[역사 조선편]
최 해 (1287ㅡ1340) 고려후기의 학자. 자는 언명부이고 호는 졸옹 또는 예산농은이다. 최해는 최치원의 후손이며 민부의랑 최백륜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살에 벌써 시를 잘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예문춘추관 검열, 장사감무, 예문춘추관 주부, 성균관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21년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료양로의 개주판관으로 있다가 병을 구실로 귀국하여 예문관 응교가 되였다. 그는 재주가 비상하였으나 아첨을 모르고 비위에 거슬리면 정면에서 말하고 정당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큰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최해는 글을 짓는데서 남의것을 모방하는것을 싫어하였으며 일단 옳다고 인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스승이거나 유명한 학자라고 하여도 따지고 론쟁하였다. 저서로서는 량반출신 작가들의 시문을 수록한 《동인지문》(25권)과 《졸고천백》(2권)이 있다. 그의 대표적시작품으로는 한자시 《3월 스무사흗날 비가 내린다》, 《우연히 읊노라》 등을 들수 있다. 
《우연히 읊노라》 한자시. 나의 옷은 솜누데기 남의 옷은 비단갖옷 남의 집은 고대광실 나의 집은 오막살이 하늘이 사람 낼 때 고르지 못했는가… 내사 남을 탓하랴만 남들 나를 수모하네 시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혹심한 당대의 부패한 사회현실을 개탄하였다. 시에서 서정적흐름의 밑바탕에는 정직하고 대바른 탓에 가난에 쪼들려야 하고 수모당해야 하는 주인공 나ㅡ시인의 불우한 처지와 이러한 불행을 강요하는 남ㅡ봉건조정의 집권자에 대한 울분이 깔려있다. 예술적측면에서 빈부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보편적인 표징으로 되고있는 의식주중에서 옷을 입고 집을 쓰고 사는 문제를 놓고 세부를 찾아 대조함으로써 사상적내용을 누구나 명백히 알수 있게 하고 선명하게 부각하여 형상의 박력을 조성하고있다. 량심적이고 빈곤한 선비의 울분을 토로한 이 시는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하여 인식적의의가 있다. 《3월 스무사흗날 비가 내린다》 한자시. 작년에 날씨가 괴상하여 농사집이 모내기를 못하였지 만백성이 모두 굶주려 서로 바라보는 낯빛이 처량하였네 금년에 또 봄부터 가물어서 해볕 바라보며 마음조였어라 우물은 말라서 푸른 진흙 드러나고 아침마다 피같이 붉은해가 떠왔다네 길거리엔 어디나 굶어죽은 시체들 들판에는 농사짓는 모습조차 사라졌네 내 늦잠자는 버릇 있건만 새벽에 깨여나 초당에 누웠더니 우수수 비 실은 바람 불어오고 처마에서 동동 비방울 듣는 소리 베개를 밀고 놀란듯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니 정말로 비가 내려 좋아서 미칠듯싶네 언덕우에 버드나무 우썩 푸르러오고 둔덕에 피던 꽃도 붉은빛이 더 어렸네 이 세상 만물들이 싱싱히 살아나니 모든것이 내뿜는구나 맑고도 고운 향기를 진정 하늘의 마음도 우리 백성의 편이로다 이랑마다 갈고 심는 농쟁기가 가득 차네 이렇게 좋은 비라 집이 새여 방안에서 우산을 받은들 어떠랴 만백성 배불리 먹을것 기뻐서 내 살아갈 걱정은 이미 잊었노라 시는 거듭되는 혹심한 가물로 인한 피해를 당대의 농사형편,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와 결부하여 노래하였다. 시에서는 먼저 통치배들의 학정의 페해가 심한데다가 한재로 인한 거듭되는 흉년때문에 농촌은 황페화되고 사람들이 굶어서 죽게 된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가식없이 진실하게 재현하였다. 시의 뒤부분에서는 이 참혹한 현실에서 더없이 괴롭고 아픈 심정을 안고 모대기다가 소생의 단비를 맞이한 서정적주인공의 기쁜 심정을 노래하고있다. 시름에 겨워 어렴풋이 잠들었던 서정적주인공은 《처마에서 동동 비방울 듣는 소리》에 잠을 깨여 창문을 열어제낀다. 생명수인양 소리없이 내리는 새벽비에 애처롭게 타죽던 이 세상의 만물이 푸른색 띠고 소생하여 《맑고도 고운 향기》 내뿜는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된 서정적주인공은 기쁨에 넘쳐 《진정 하늘의 마음도 우리 백성의 편이로다》고 소리높이 웨치며 《이렇게 좋은 비라 집이 새여 방안에서 우산을 받은들 어떠랴. 만백성 배불리 먹을것 기뻐서 내 살아갈 걱정은 이미 잊었노라.》고 노래하였다. 시는 당시 농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진실하게 보여주고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동정하는 시인의 진보적인 사상경향을 반영한것으로 하여 문학사적의의를 가진다. 
단점이자 장점 최해는 《예산은자전》에서 주인공이 좋은 사람과만 상종하고 욕심많은 사람과는 대상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 어려웠는데 이것이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였다고 썼다. 이 전기문학의 주인공이자 곧 작가자신이다. 작가 최해에게는 이런 의미에서 단점이자 장점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 그가 아직 젊었을 때였다. 한번은 그가 경상도 동래현이라는 바다가 고을을 지나다가 명승인 해운대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경치가 소문난 그대로 아름다웠다. 바다풍경, 소나무의 고상하고 우아한 풍치, 맑은 바람, 그는 몸과 마음이 상쾌하였다. 흥겨운 마음으로 둘러보는데 한그루 소나무에 껍질을 벗기고 무슨 글자를 써놓은것이 눈에 띄였다. 저게 무엇일가 하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합포만호 장선이라는 사람이 시를 지어서 거기에 써놓은것이였다. 장선은 합포라는 곳에 있는 수군의 중간급무관이였다. 최해는 그 시를 읽어보고 대번에 눈살을 찌프리면서 참지 못하는 성미그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슬프다! 이 나무여, 무슨 액운(불길한 운명)을 만나 이런 나쁜 시를 새기게 되였는고.》 최해는 그 자리에서 나무에 써놓은 시 같지 않은 나쁜 시를 말끔히 깎아버렸다. 그렇게 하고도 화를 당한 소나무가 가엾게 생각되여 흙을 개다가 껍질벗겨진 부분을 잘 발라준 다음 안동쪽을 향해 떠나갔다. 이것을 안 장선이 대노하여 날랜 장사 서너명을 내보내서 당장 잡아오라고 호령하였다. 그 장사들이 가보니 최해는 이미 죽령을 넘어 서울로 떠나간 뒤였다. 그들은 최해 대신 그에게 시중든 사람 하나를 잡아다가 목에 칼을 씌워서 문밖에 세워두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장선은 사람들속에서 웃음거리가 되였고 최해의 재주가 사람들의 무지를 조소하는데 넉넉하다는 말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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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탁
(1262ㅡ1342)
고려후기의 학자. 자는 천장이고 호는 역동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녕해군 사록이 되였다. 그후 중앙관청에 소환되여 감찰규정이라는 법기관의 벼슬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성균관의 제주라는 벼슬을 지냈다. 우탁은 당시의 봉건집권층이 취하는 그릇된 친원정책과 통치배들 내부모순의 격화로 고려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지는데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례안현으로 내려가 농촌생활을 하였다.
왕이 우탁의 강의하고 곧은 성품과 충의심을 존중하여 다시 벼슬살이를 하도록 불렀으나 이미 로년기에 이른 우탁은 봉건통치집단안의 부패무능에 환멸을 금할수 없어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대교육에 힘쓰며 창작에 열중하다가 생을 마치였다.
탐구심이 강한 우탁은 유교정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다.
문학분야에서 우탁은 시조창작과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조집들인 《해동가요》와 《가곡원류》, 《남훈태평가》에는 우탁이 지은 시조 3편이 올라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여러 시조창작가들가운데서 우탁이 그중 많은 시조작품을 남긴것으로 된다. 우탁의 시조작품은 그 내용으로 보아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의 체험을 반영한것도 있고 벼슬을 내놓은 이후시기인 로년기의 심정을 읊은것도 있는데 그 밑바닥에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봉건집권층의 그릇된 행위들에 동의할수 없는 그의 비판적인 태도가 놓여있었다. 대표작으로 시조 《림고대…》를 들수 있다.

《림고대…》
평시조.
림고대 림고대하야 장안을 굽어보니
운리제성 쌍봉궐이오 우중춘수 만인가로다
아마도 번화승지는 이뿐인가 하노라
해석]
높은 대에 오르고 또 높은 곳에 올라
장안을 굽어보니
구름속에 잠긴 개경에는 쌍봉궐이 있고
봄비에 나무는 푸르른데 만호의
집이 잠겨있구나
아마도 번화하고 경치좋은 곳은 이곳
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당시의 수도 개경의 아름다운 풍치를 노래하고있다.
구름속에 싸인 개경의 왕궁, 봄비에 푸르러진 나무와 그속에 잠겨있는 10 000호의 주민가옥들, 마치도 수도의 맑은 공기와 봄비소리까지도 느껴지게 그려놓은 한폭의 풍경화라고 할수 있다. 수도 개경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여있고 그것을 통하여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사랑하는 시인의 애국심이 소박하게 반영되여있다.
시조에는 어려운 한자문구가 많고 봉건유학자의 시점에서 수도풍경을 노래하였을뿐 인민대중의 생활감정을 반영하지 못한 제한성이 있으나 조국강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수도풍경의 묘사를 통하여 노래하였고 발생 초시기의 시조형식을 능숙하게 활용한 점에서 문학사적의의가 있다.

바다속에 처넣은 귀신단지
우탁은 불같은 성미그대로 미신행위도 결패있게 막아냈다.
그가 동해기슭에 있는 녕해고을에 사록이 되여 부임한 직후였다. 고을의 거리바닥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으슥한 곳에 팔령사당이 찌글사하게 서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건물이라고 말할수조차 없는 볼품없는 사당안팎을 살펴보니 종이 오린것이며 울긋불긋한 천쪼박들이 걸려있어 바다바람에 어지럽게 꼬리치고있었다. 그런 주제에 바닥에 놓인 제사상우에는 떡, 과일, 물고기 등에다가 돼지대가리까지 얹혀있었고 향을 피운 연기가 가는 실오리처럼 피여오르고있었다.
《이것이 무슨 귀신사당이냐?》
우탁이 따라온 고을의 아전에게 물었다.
《예, 팔령신을 위한 사당이올시다.》
《그래, 그 팔령신이라고 하는 요사한 귀신이 이 고을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다주었느냐?》
《저…》
아전은 새로온 사록이 이런 사당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수 없어 약간 갑자르다가 어정쩡한 대답을 하였다.
《그건 잘 모르겠사오나 아무튼 이 고장 사람들은 병자가 생기던가 무슨 소원이 있으면 이 사당에 음식을 차려놓고 빕니다.》
《빌지 않으면?》
《저… 빌지 않으면 큰 화를 입는다고 모두들 겁을 냅니다.》
우탁은 당장 《에끼, 이 시라소니같은것들》하고 호령을 치고싶었으나 잠자코 숙소로 돌아갔다.
그 이튿날 우탁은 아전과 군졸 몇명을 데리고 어제 갔던 사당으로 다시 갔다.
《저 귀신사당을 허물어라.》
따라온 사람들이 아연해졌다. 지금까지 고을에 부임해온 관원들이 한둘이 아니였으나 어느 누구도 이런 령을 내린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록은 별난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들은 팔령신의 노여움을 사서 무슨 화를 입으려고 사당을 허물라는것인가 하여 우탁을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엇들 하느냐, 령을 지체없이 시행하지 못할고.》
그때에야 정신이 든 아전과 군졸들이 팔령신이 노해서 내리우는 벌을 근심하기에 앞서 당장은 분부시행을 안한 죄로 볼기맞을 걱정이 더해서 마지못해 사당을 허물었다.
우탁은 허물어버린 사당에서 귀신단지를 꺼내라고 하더니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오라는것이였다.
그는 바다가 절벽우로 갔다.
《그것을 저 바다에 처넣어라.》
아전과 군중들이 그것만은 손이 떨려 주저하는데 우탁은 뢰성같은 호령으로 어서 던져넣으라고 독촉하였다. 그는 끝내 귀신단지를 바다물속에 내던지는것을 보고야 돌아왔다.
그날 고을의 한 모퉁이에서는 우탁에 대한 뒤소리가 수근수근 돌아갔다.
《팔령사당의 령험한 신령님이 노했을테니 새로 온 사록이 오늘밤을 무사히 못넘길거야.》
《그것도 그거지만 우리 녕해고을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누가 알가베. 그것을 생각하면 윽, 오한이 난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날의 해가 떠오른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젊은 사록은 고뿔 한번 앓지 않았고 고을도 아무일 없었다. 이리하여 고을의 몽매한 축들도 차츰 팔령신을 믿는다는것이 허황한 노릇인줄 깨닫기 시작했고 우탁이 있는 동안 녕해고을에 귀신사당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경대부들은 자기의 죄를 아는가》
젊어서 불같은 성미였던 우탁은 장년기에 이르러 칼날우에도 올라설만큼 강직한 인간으로 성숙되였다.
우탁이 감찰규정으로 소환되여 개경을 올라온 후에 있은 일이다.
1309년에 충렬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들어앉게 되였다. 다섯해밖에 왕노릇을 못한 이 충선왕은 몹시 부화방탕한 인간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군하였는데 한번은 그 부화방탕이 도를 지내 넘어서 사람들의 분격을 자아냈다. 그때 왕궁에 숙창원비라는 녀인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다치지 말아야 할 이 녀인을 욕보였던것이다. 여론이 물끓듯하였으나 왕의 측근신하들은 제 목과 벼슬자리가 아까워서 왕의 이 인륜도덕에 어긋나는 폭행을 모르는척하고있었다. 이런짓이 사람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었다.
우탁이 이 사실을 알게 되였으니 그 성미에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는 결사의 뜻을 표시하는 흰옷차림을 하고 날을 시퍼렇게 간 도끼를 들고 거적을 말아서 지고 궁궐로 달려갔다. 거적을 펴고 그우에 엎드려 왕의 비행을 날카롭게 비난한 글을 왕에게 제출한 다음 회답을 기다렸다. 참으로 그 차림새, 그 행동, 그 기상은 죽음을 각오하고 왕의 불의와 비행을 충고하는 의로운 사람의 모습이였다.
일이 이렇게 번져지자 근신들은 누구도 감히 우탁의 글을 왕에게 전할념을 못하고 손만 와들와들 떨었다. 이 꼴을 본 우탁은 추상같은 추궁으로 근신들을 개몰듯 하였다.
《공경대부(고관)들은 자기의 죄를 아는가. 상감마마의 측근신하인 그대들의 잘못때문에 임금이 오늘과 같이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줄 모르는가. 아직도 자기의 죄를 모르는가 말이다.》
이 말에 근신들은 땀을 뺐고 왕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하기는 쉽지 실지로 우탁과 같이 결사의 각오로 이렇게 행동하기는 만에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열정의 인간 우탁도 다가오는 늙음만은 막아낼수 없었다.
그는 조용한 틈을 타서 시조를 지어 불렀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그가 지은 시조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저근듯 빌어다가 마리우희 불니고저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 저근듯ㅡ잠간만
※ 마리우희 불니고저ㅡ머리우에 불게 하여
※ 서리ㅡ백발
우탁이 이처럼 늙어가는 몸을 두고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것은 단순한 생의 애착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는 몸은 비록 늙어가도 학문탐구에서는 늙음을 모르는 정열가였다. 로학자 우탁의 학문에 대한 열도가 얼마나 뜨거웠는가 하는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일화만 들어보아도 그가 어째서 늙음을 막아보겠다고 노래했는가에 대해서 잘 알수 있다.
그 무렵 이웃나라에서 동양철학의 한개 류파인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퍼지기 시작했다. 이 학설은 송나라 학자들인 주돈이, 정이, 주희 등이 내세운 학설인데 생겨난지 얼마 안되였던것이다.
처음 들어와서 퍼지기 시작한 생소한 학설이여서 우탁이 살고있는 고장에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탁자신도 얼핏 읽어보아서는 내용이 잘 안겨오지 않았다. 더우기 난감한것은 젊은이들이 그 학설에 대하여 물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것이였다.
우탁은 결심했다.
(이거 안되겠군. 아무리 내가 늙었어도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아야 하겠군.)
그는 방문을 안으로 닫아매고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집안식구들은 로인이 그러다가 잘못될가봐 겁이 나서 속이 달았고 찾아온 나그네들은 면회거절의 리유를 알고 젊은이들도 새우기 힘든 밤을 연거퍼 새우는 우탁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표시하고 돌아섰다.
우탁은 날이 새는지 밤이 오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 구해온 책들을 자자구구 파고들어 따져보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 스무날이 흐르고 한달이 되였다. 드디여 우탁은 굳게 닫아맸던 방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에 젊은이들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우탁은 달포동안이나 쉬임없는 탐구를 하였지만 학문토론에서는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제기된 질문을 죄다 풀이해주었다.
강의를 듣고 나온 젊은이들은 탄복했다.
《과시 우리 스승은 〈역동선생〉이야. 동방의 큰 철학가라는 호를 들을만하다니까.》
《노력이 천재라고 하지만 우리 선생님의 그 노력과 열정은 학문을 발전시킬 자각과 결심의 산물이거던. 그 결심에는 늙음도 길을 비켜선다고 할수 있지.》
진 화 (12세기말ㅡ13세기 전반기) 고려중기에 활동한 시인. 호는 매호이다. 리규보, 김극기 등과 함께 고려중기에 이름을 날린 재능있는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의 경력과 창작활동에 대한 자료들이 《보한집》, 《력옹패설》, 《동인시화》, 《기아》 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참고로 하여 후세사람들이 편찬한 《매호집》에 실려있으나 자세하지 못하다. 1198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승지, 지제고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말년에는 우사간벼슬을 하였다. 그는 불공평하고 모순에 찬 당대의 사회현실과 권력싸움이 거듭되는 정계생활에 불만을 품고있었으며 그로부터 출발하여 은일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권세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동정하였다. 시 《가을날 느낀바를 적노라》에서 시인은 풍요하면서도 서글픈 가을철의 정서를 당대의 현실생활과 결부시키면서 부귀한자들도 가을은 구슬프다고 하거늘 살가죽 가리울 옷 한벌 없는 가난한 사람이야 말할나위 있겠는가고 하였으며 사랑도 미움도 수없이 겪어온 곡절많은 정계생활을 떠나 아늑한 산촌에서 세상근심 잊고 살아가려는 생활의 지향을 노래하였다. 진화의 시작품들은 랑만주의적색채가 강하고 표현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정서가 짙은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은 《월궁을 노닐며》, 《매화를 읊은 시에 화답하여》, 《가을날 비온 뒤에》, 시초 《송적팔경도》의 《모래벌의 기러기》, 《어촌의 저녁》 등 작품들에서 잘 표현되고있다. 13세기에 창작된 경기체가요인 《한림별곡》의 첫절에서도 노래되고 《보한집》, 《동국리상국집》에도 씌여져있는바와 같이 당대의 문단에서는 리규보와 진화를 함께 칭찬하면서 《리정언, 진한림》이라고 불렀다. 진화의 시작품들은 고려후기의 시문학에서 표현된 랑만주의적경향의 특성을 밝히는데 도움을 준다. 그의 시작품으로 한자시 《도원의 노래》, 《버들》 등이 있다. 
《 버 들 》 한자시. 서울 서쪽언덕에 만가닥 실버들가지 봄시름 머금고 평온한 그늘 이루더니 사나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연기속에 비속에 다 시들어버렸네 시 《버들》은 무신들의 정변으로 하여 빚어지고있는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증오와 울분속에 노래한 작품이다. 시인은 재치있는 형상적비유와 대조의 수법을 통하여 무신정변이후의 엄혹한 현실을 실감있게 보여주고있다. 시에서는 무신들의 전횡과 폭압정치를 봄시름 머금고 평온한 그늘을 이루었던 만가닥의 실버들가지들을 모조리 시들어버리게 한 사나운 바람에 비유하였고 끊임없이 불어오는 사나운 바람으로 하여 시들어버린 연약한 실버들가지의 처량한 모습을 통하여 살륙과 공포의 분위기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동정을 표시하였다. 《도원의 노래》 한자시. 동해 푸른연기 풀잎우에 삼삼하고 향기로운 란초지초 남산우에 무성하다 진나라의 모진 범 피하여왔다는 여기가 바로 선경이란 무릉도원 시내물 굽이쳐 산어구로 흘러나고 땅좋고 물이 흔해 이랑마다 옥토로세 삽살개 짖는소리 한낮은 늦었는데 꽃잎 나붓겨 봄바람은 건듯 부네 복숭아나무 심어놓고 고향생각 잊었다네 진시황 책을 불살라버려 그 뒤일은 알리 없네 꽃피고 잎이 지니 봄가을을 알리도다 아이를 얼리면서 모든 일 다 잊은듯… 배사공 이곳에 한번 갔다 돌아온 후 아득할사 천년만년 다시 찾지 못했다네 … 시는 크게 두개의 부분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전통적으로 전해지고있는 리상향인 《무릉도원》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사상감정을 노래하고있다. 시인은 《무릉도원》의 리상적인 생활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처럼 살기 좋은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수도 없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밝히면서도 그 어떤 신비하고 몽롱한 꿈세계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세계, 인간의 숨결이 실제적으로 미치고있는 산촌의 자연으로 그려내였다.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무릉도원》묘사에서의 이러한 특성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시인의 태도, 창작가의 미학적리상과 관련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산수파문인들의 경우와 같이 현실도피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전설적인 《무릉도원》의 리상적인 세계를 펼쳐보인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현실에 대치시켜 《무릉도원》을 펼치였고 그를 통하여 눈물없고 편히 살수 있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념원과 숙망을 표현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은 랑만주의적경향과 사실주의적경향이 결합되여있는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특징은 시의 뒤부분에서 더욱 뚜렷이 표현되고있다. … 그대는 보았는가 우리 땅 강남마을 대로 사립엮고 꽃은 울타리라 달밤에 시내물 졸졸 흐르고 나무엔 산새들 재재잭거린다네 다만 한스러운것 이 땅의 백성들 살림살이 나날이 쪼들려만 가는것이라네 고을의 관리놈들 세금내라 쌀내라 문을 두드리며 날마다 성화로다 이렇게 백성들을 못살게만 굴지 않으면 우리 나라 산촌 모두가 도원일세 이 시속에 숨은 뜻 있나니 그대는 버리지 말게 나의 이 노래를 … … 시인은 사람들이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지 않고 평온하고 화목하며 유족하게 살아가는 그러한 리상적인 생활세계를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하는 몽롱한 《무릉도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있는 내 나라 내 땅에서 찾고있다. 시는 생활반영의 사실주의적경향과 지향의 랑만주의적특성으로 하여 리인로의 시 《세상살이 어려워라》와 일련의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와 구별되는 새로운 특징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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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서 부른 노래
이 일화는 정서가 모함을 당하여 고향으로 쫓겨가있으면서 《정과정》을 지은 사실을 담고있다.
정서가 벼슬살이를 할 때 조정안에는 그와 의사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종이 죽고 그의 아들 의종이 왕위에 오른 기회를 타서 정함, 김존중 등이 정서가 새왕의 동생 왕경을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고 들고나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서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궁지에 몰리게 되였다. 의종왕은 정서가 그런짓을 할 인물이 못되는줄 알고있었지만 정서를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내의 론의가 일어나자 더는 정서를 그대로 둬둘수 없어 고향인 동래로 내려보내게 되였던것이다.
의종은 떠나가는 정서를 조용히 만난 자리에서 그를 위안도 할겸 자신의 심정도 토로하면서 짤막하게 한마디 하였다.
《오늘 그대가 가는 걸음은 조정의 공론에 압박되여 할수 없어서 취한 일이니 멀지 않아 소환될것이다.》
왕은 무책임한 소리를 한마디 하였지만 물에 빠진자의 처지에 떨어진 정서에게는 이 말이 천근무게로 안겨왔다.
정서는 왕이 설마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하는 믿음으로 자기의 서글픈 심정을 달래면서 동래에서 소환령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오랜 시일이 지났으나 소환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속았구나 하는 허망한 생각, 그래도 혹시 하는 허황한 기대, 억울하고 한스러운 자기의 처지에 대한 번민으로 정서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정서는 가야금을 타면서 자기의 이러한 서글픈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 노래는 처량하였다. 이때 정서는 한자시를 지어서 읊은것이 아니라 우리 말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이 노래가 《정과정》이였다.
《정과정》은 사상적내용에서 제한성이 있으나 신의없는 왕에 대한 원망, 조정관료들의 부당한 처사와 세력다툼에 대한 비난의 감정을 깔고있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였고 문학사에도 고려국어가요의 하나로 올라 후세에 알려지게 되였다.

장 진 공
(10세기 후반기)
고려전기의 문인.
고려 광종(통치년간 950ㅡ975)시기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때 우리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밖의 경력은 알려진것이 없다. 대표작으로 고려국어시가를 한자시로 번역한 《한송정》이 있다.

《 한 송 정 》
고려초엽에 창작된것으로 추정되는 가요.
본래 우리 나라 국어시가를 한자시로 번역한것이다.
한송정에 달빛 밝고
경포에 가을물결 잔잔한데
구슬피 울어예는 갈매기 한마리
정든 모래터를 못 떠나
노래는 조국강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짙은 민족적정서로 반영하고있다.
한송정과 경포대는 강원도(남)의 강릉에 있는 명승지이다. 작품은 이 명승지의 정서를 밝은 달밤, 잔잔한 가을파도에 담아 형상하면서 유정한 사랑의 감정을 갈매기마저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표현으로 생동하게 살리고있다. 아름다운 시상을 소박하면서도 정답게 그리고 음악적선률이 저절로 울려나올수 있게 형상한것도 이 작품의 우수한 예술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고있다.

민족적긍지감을 안고
장진공은 력사에 명성을 크게 떨친 높은 벼슬아치도, 대단한 학자나 작가도 아니였다. 그는 작품집을 남긴것도 없고 유명한 작품을 창작한것도 없다. 다만 《고려사》와 《여지승람》이라는 지리도서에 우리 나라 노래를 번역한 한자시 《한송정》과 그 번역경위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남아있을따름이다.
이 한편의 번역시로 하여 장진공은 문학사에 지울수 없는 공적을 새기였다. 시 한편을 잘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시인은 있지만 한편의 노래를 번역한것때문에 력사에 오른 장진공과 같은 실례는 드물것이다.
장진공이 문학사에 남긴 교훈은 시를 창작했는가 번역했는가에 따라 력사에 오르고 못오르는것이 갈라지는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시가에 대한 민족적긍지감을 얼마나 뜨겁게 지니고 그것을 얼마나 진실하고 훌륭하게 형상해내는가에 달려있다는것이다.
중국의 남쪽지방에 강남이라는 고장이 있다.
언제인가 이 강남지방사람들은 일찌기 본 일이 없는 아담한 현악기 하나를 손에 넣게 되였다. 노래를 좋아하는 이 고장 사람들이 알아보니 처음보는 이 악기가 고려의 슬이였다.
줄을 튕기면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며 울리는 악기 슬!
그것이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고려에 태여나서 한번만이라도 가보았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는 천하절경 금강산이 있는 동방례의의 나라, 맑은 아침의 나라의 악기라는것을 알게 되자 이 현악기에 대한 강남지방사람들의 관심은 더더욱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특히 그들의 호기심을 끈것은 이 슬의 뒤면에 글자들이 적혀있는데 그 내용을 전혀 알수 없는 사실이였다.
사람들은 저마끔 앞을 다투어 낯선 악기와 거기에 적혀있는 글자구경을 왔다. 글줄이나 읽었다는 선비들은 저저마다 그 글의 뜻을 풀어보겠다고 접어들었다. 찾아올 때는 누구나 범을 잡겠다고 나선 포수처럼 이 글의 수수께끼를 풀어 유식함을 자랑해보겠다는 의욕으로 발걸음이 활발하였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다들 머리밑만 썩썩 긁었다. 고려말을 들어보았거나 고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떠받들리우겠는데 이 고장은 고려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나니 그런 사람도 없었다. 보배로운 악기를 모처럼 얻고도 거기에 적혀있는 글뜻을 몰라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이런 때 고려의 사신이 이 고장에 온다는 소문이 강남땅에 쫙 퍼졌다. 그들이 목을 길게 뽑고 3년왕가물에 비오기를 기다리듯 하고있는데 고려사신으로 장진공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장진공은 악기 슬의 뒤면에 적혀있는 글의 뜻을 풀어달라는 이 고장사람들의 간절한 부탁을 받았다.
그가 슬을 받아들고 거기에 적혀있는 글을 읽어보니 한송정과 경포대의 아름다운 바다가풍경을 노래한것이였다.

그 순간 장진공의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고국에서 멀고 먼 고장인 이 강남땅에 와서 고국의 노래를 적은 글줄과 민족악기 슬을 대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의 눈앞에는 동해안일대의 천하절경이 선하게 떠오르고 그의 귀에는 동해안의 파도소리와 정답게 울어예는 갈매기소리, 맑은 바람소리가 울려오는것 같았다. 장진공은 고려의 음악에 그리도 관심이 높은 강남사람들의 진정에 감동되였다.
그는 노래의 내용을 설명해주었는데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될것 같았다. 강남사람들의 성의를 보아 이 노래의 구절구절을 오래도록 외우고 전해가도록 해주고싶어졌다. 그는 손에 붓을 들고 민족적긍지와 책임감에 넘쳐 될수록 원노래 그대로가 살아날수 있도록 말마디를 고르고 시어배렬을 잘하기에 무진애를 쓰면서 번역을 하여주었다. 강남사람들은 고려사절이 말해주는 노래의 뜻풀이를 듣고 번역해준 시를 읽어보면서 고려의 유명한 동해안풍치를 눈앞에 직접 보는듯 황홀해졌고 그 명승을 진실하면서도 소박하고 방불하게 형상한 고려노래의 우수성에 탄복하였다.
이러는 그들을 보면서 장진공은 고려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슴뿌듯이 느끼였고 노래 한편이 이렇듯 민족의 영예와 긍지를 빛내주는데 대해 놀라웁기 이를데 없었다.

고구려는 중세 우리 민족사의 기본흐름을 주도한 나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고구려는 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고구려는 삼국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놀았을뿐아니라 그 이후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 큰 영향을 준 나라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는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놀았으며 그 이후 력사발전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고 기틀을 마련한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중세 민족사의 기본흐름을 주도한 나라로 될수 있었다.
1,고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나라
고구려는 우리 나라 력사상 첫 고대국가이며 대표적인 나라인 고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직접 계승함으로써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주도한 나라로 되였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원시조 단군에 의하여 B. C. 30세기초에 동방에서 제일먼저 형성되여 근 3천년간 발전한 고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나라였다.
단군릉에서 단군의 뼈가 발견됨으로써 고대사연구분야에서는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으며 결과 고조선은 B. C. 30세기초에 성립되여 단군조선(전조선), 후조선, 만조선 등 세개의 왕조가 교체되면서 발전해왔다는것이 밝혀지게 되였다.
한편 B. C. 15세기중엽에 단군조선이 후조선으로 교체될 때 단군조선의 후국으로 있던 부여, 구려, 진국은 거기로부터 떨어져나와 B. C. 12세기이전에는 독자적인 노예소유자국가로 발전하였다.
결국 단군조선시기 우리 인민은 평양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한 주권밑에서 오래동안 생활하는 과정에 피줄과 언어, 문화의 공통성은 더욱 공고화되여 하나의 조선민족을 형성하게 되였다.
후조선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단군조선시기 형성된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성과 문화의 공통성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B. C. 3세기초부터 A. D. 1세기까지 노예소유자사회가 봉건사회로 넘어갔는데 봉건사회 첫 시기인 삼국시기에 고구려가 고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였다.
고구려는 우선 고조선의 령역과 주민들을 차지하여 그 계승국임을 명백히 하였다.
고구려는 부여국에서 갈라져나온 주몽세력이 구려국에 내려와 세운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였다.
옛 기록에 《맥족》으로도 알려진 부여국과 구려국의 주민들은 고대시기 조선민족의 일원이였고 따라서 고구려의 기본주민이였다.
그리고 그후 고구려가 소국통합과 고조선의 옛 령토를 모두 되찾은 4세기부터는 고조선의 옛주민들을 거의 포섭하여 고구려주민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령역과 주민을 차지한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고구려는 특히 427년에 3천년간 고조선의 수도이고 민족의 원시조 단군의 고향인 평양에 천도하여 200여년이나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위해 남방진출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데도 있었지만 주되는 목적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고조선의 계승국임을 뚜렷이 하자는데 있었다.
고구려는 정치, 경제, 문화분야에서도 고조선의 체계를 계승하였다.
고구려에서 왕밑에 대보(후에 국상, 막리지)를 수석으로 하고 중앙관료들을 총괄하게 한 중앙통치체계는 고조선의 왕다음에 호가를 두고 국가의 모든 사업을 보게 한 통치체계를 이어받은것이였다. 그리고 경제분야에서는 두 나라가 다 농업을 위주로 하는 나라였고 소, 말을 많이 키워 농업생산과 국력강화에 리용하였다.
또한 문화분야에서는 고조선의 돌무덤을 계승하여 고구려가 돌각담무덤, 돌칸흙무덤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