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4 로영무는 강철룡을 데리고 아빠트둘레를 한바퀴 걸어 돈 다음에야 최승진의 집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선 그들은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술냄새와 담배연기, 후끈한 화기에 휩싸여버렸다. 서재쪽에서 즐거운 말소리들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반에 빈 접시들을 담아들고 나오던 윤희가 깜짝 놀라며 손에 든것을 얼른 복도에 내려놓고 달려나와 반겨웃으며 인사하였다. 남편의 성공에서 오는 행복감과 누가 억지다짐으로 권하는 술 몇잔을 받아마신때문인지 그 녀자의 얼굴에는 홍조가 타올랐다. 《오셨구만요. 정말 고마와요. 어서… 어서 들어가세요. 아이 모두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주부의 말소리를 듣고 부연출 한기석이 달려나왔다. 취흥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로영무의 팔을 끼고 서재쪽으로 이끌며 섭섭한 소리를 했다. 《아니 어째 이렇게 늦어졌습니까, 제일먼저 달려와야 할 연출가동지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빈자리가 비여있으니 영 분위기가 생기지 않았는데…》 서재에는 두리반상 두개가 가지런히 놓였는데 상마다 술병과 맥주병, 안주접시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흥취를 돋구었다. 상둘레에 둘러앉은 연출가들과 촬영가들, 몇명의 배우들은 로영무가 방에 들어서자 모두 반색을 하며 한마디씩 떠들썩하게 인사말을 하였다.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가극단 작곡가 고일명이만이 로영무와 사돈간이여서 체면을 차리는지 그저 빙긋이 웃어보이며 눈인사를 보낼뿐이였다. 두사람은 오래전부터 가까운 친구지간이였는데 자기 딸을 고일명이 아들한테 준 다음부터 로영무는 웬일인지 그를 좀 멀리하게 되였다. 그래서 그의 눈인사에 머리만 끄덕여보이는데 상좌에 앉아있는 최승진이 일어나기까지 하며 로영무를 자기곁으로 불렀다. 그때 한기석이 무슨 기염을 토하든가 객기라도 부리고싶은지 최승진을 눌러앉히고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좀 조용들 하시오. 자, 자, 정숙-》 최승진의 밑에서 내내 부연출을 담당해오는 그는 이 집에서 망년회가 열린다든지 무슨 대사가 생기면 스스로 집행자, 사회자의 역을 맡아나서군했었는데 오늘저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안주상에서 큼직한 사과한알을 쥐여올려 흑흑 불어보더니 그것을 로영무의 입앞으로 쑥 내밀며 제법 세련된 방송기자의 말투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방송 기자입니다.》 영문을 몰라 눈을 내리뜨고 코밑에 들어온 사과만 지켜보던 로영무가 모든것을 즉시 깨닫고 웃어보이며 그의 너스레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흐,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이 눈오는 날에 먼길을 걸어오신것 같은데 아바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저요? 예- 저는 황철 용광로 로장이올시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슨 볼일로…》 《예… 다름아니라 여러분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철로동계급들을 대표해서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한기석은 사과를 자기 입앞으로 가져온다음 좌중을 향하여 환희에 넘쳐 소리쳤다. 《여러분, 영화예술인동지들, 여러분을 축하하기 위하여 황철에서 불원천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황철로동계급의 대표를 열렬히 환영합시다!》 손님들은 한때 재치있는 배우였던 로영무의 림기웅변의 연기술에 감탄하면서 모두 좋아라 웃어대며 박수를 쳤다. 그중에서도 기뻐하는것이 최승진이였다. 그는 박수를 치다가 로영무에게 곁으로 오라고 손짓하였다. 로영무가 그의 곁에 자리를 잡자 한기석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강철룡의 입앞에 사과를 내밀었다. 《동무도 어딘가 먼곳에서 오신것 같은데요? 2.8비날론에서 왔는가요? 성진제강에서 왔는가요?》 강철룡이 그 사과를 움켜쥐려고 했다. 한기석은 사과를 자기입앞으로 도로 가져가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마이크를 자기 손에 쥐고 말하자는걸 보니 이 동무는 할 이야기가 많은것 같습니다. 그 소원을 존중하여 마이크를 넘겨주겠습니다.》 강철룡은 그가 넘겨주는 사과를 받아쥐고는 아무 소리 없이 촬영가들속에 끼여앉더니 그것을 맛스럽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여, 여, 이게 무슨 비예술적인 행동인가?》 그는 애써 웃어보이려고 하며 말투를 롱조로 돌렸다. 《저 친구 마이크를 저렇게 맛스럽게 먹는걸 보니 쇠붙이를 먹구사는 불가사리구만, 불가사리가 분명해 허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남의 마이크를 씹어먹는건 무슨 심보인가? 여, 강개탄, 정말 개탄할 일인걸.》 강철룡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볼이 불룩해져 사과를 씹으며 능청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흘금흘금 훔쳐보았는데 그 눈길은 이렇게 말하는듯 했다. (불가사리구 심보구 나는 우선 속이 출출해서 먹고부터 봐야겠네.) 그 익살에 손님들은 박수까지 치며 웃어대고 최승진은 저 친구 저런 괴짜였던가 하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로영무만은 웃지 못하였다. 오늘저녁의 그의 심상치 않은 기분상태를 알고있었기때문이다. 로영무는 젊은이의 익살밑에 선의아닌 그 무슨 심보가 깔려있는것 같고 또 그것을 모두가 느끼기만 하면 흥겨운 자리가 잡쳐지지나 않을가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아 화제를 딴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그는 자기 보기에도 최승진이네 제작단이 이번 작품을 맡아가지고 이전의 어느 작품때보다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것같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모두 그의 말에 긍정하게 되여 화제가 그 방향에로 줄달음쳐나갔다. 한기석이 신명이 나서 말을 제일 많이 하였다. 그는 이젠 다 옛말로 되였다고 하면서 처음 제작단예산액이 백여만원이상으로 나왔을 때 창조경험이 많고 심장이 큰 연출가동지도 그 엄청난 액수에 속이 질려 아닌게 아니라 얼굴색이 어둑해졌댔는데 그때 함께 운명을 걸고 연출가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짐에 어깨를 들이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고 하며 회심의 모두숨을 내쉬였다. 고일명이 도드라질사한 이마를 번들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요. 연출가의 예술적신념이 이번 작품을 성공시켰소. 어떤 사람들은 어느 행정간부가 소심성과 로파심으로부터 몇마디 해도 인차 속이 흔들려 그의 견해에 숙어드는데 그런 위인들은 절대 문제작을 낼수 없소. 시내에서 전차를 갈아타는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자기 견해로부터 남의 견해로 옮겨타는 그런 졸장부들은 안돼. 절대 안되오. 예술적신념과 재능… 이건 성공이 비결이요.!》 《옳습니다!》 한기석은 환성을 질렀다. 최승진은 지나간 일들을 더듬는듯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강철룡은 곁에서 권하는 고뿌를 받아 맥주를 욕심스럽게 들이키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안주접시들을 둘러보았다. 로영무는 저도 모르게 강철룡에게서 한기석에게로, 다시 그에게서 강철룡에게로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두 청년은 겉모습이 풍기는 인상부터가 판판 달랐다. 한기석이 비옥한 땅에서 곧게 자라오른 뽀뿌라나무라면 강철룡은 척박한 산비탈바람받이에서 간신히 자라오른 가둑나무였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의 가정에서 나서 사회의 혜택과 가정의 유족하고 문화적인 환경속에서 구김살없이 자라난 한기석은 우선 겉모습부터가 부모들의 미모를 물려받아 인상좋은 훤한 미남인데다가 괜찮은 문화적소양과 예술적소질까지 겸비하고있어 부연출가들속에서는 단연 뛰여난 존재였다. 강철룡의 경우에는 그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의 부모들은 두메산골의 농민이였는데 아버지는 일찌기 세상을 떠났었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보살핌속에서 초중까지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 군대에 나갔었는데 그때까지 기차나 살아있는 작가나 예술가를 만나본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전선부대들에서 목소리가 좋은 덕에 예술소조공연에 뽑혔는데 그것이 계기로 되여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활동에 의하여 영화촬영소에까지 오게 되였다. 때문에 그의 소박한 지식과 문화적소양에는 무지의 공간이 많았으며 자신도 그것을 촬영소생활에서 시시각각으로 느꼈다. 그러나 주눅이 들대신 원대한 포부를 안고 공부하고있는 청년이다. 그는 일찌기 군대에서 공병부문의 대좌로 있다가 제대되였으며 현재는 건설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는 형네 집에 얹혀살았다. 한기석과 강철룡… 두 청년은 여간 다정한 사이가 아니였으나 이따금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 발끈해져서 론쟁을 벌리였으며 그러다가는 크게 웃으며 합의점에 도달하는가 하면 한동안 서먹하게 지내는 때도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 그들의 우정은 더 깊어지는듯했다. 최승진이 로영무의 팔을 건드리며 맥주를 권하였다. 《로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오?》 《아니 그저 좀…저 기석이하구 철룡이를 보라구. 얼마나 개성이 판이한가?》 《하긴 그래… 한 친구는 사과를 마이크로 내밀었는데 다른 친구는 그것을 넙적 받아 먹어치웠거든 허허… 괴짜야. 나는 저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가 늘 고심하는 작중인물의 개성화에 대해 생각한적이 있네. 저런 뚜렷한 대조만이 개성화를 용이하게 하겠구나 하구 말이요.》 최승진이 가늘게 쪼프린 명상적인 눈으로 아래상에서 떠들어대는 친구들쪽을 여겨보는데 한기석이 무엇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연출가동지, 어째 상좌에선 여기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립니까. 이거 정말 재미가 적습니다.》 한기석은 벌써 어지간히 취기가 올라 얼굴이며 목까지 벌개졌다. 《아니 여보, 그렇게 보지 마오. 우리끼리 별로 이야기한건 없소. 저마끔 제 생각에 잠기다나니.》 《여기선 연출가동지 흉을 좀 봤습니다. 흉을… 평소엔 사람이 좋다가도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폭군이 된다구요. 저 바다가장면을 촬영하던때 일이 생각납니까?》 최승진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무엇인가 불쾌한 일을 더듬는것 같았다. 한기석은 신명이 나서 계속했다. 《시체로 되여 바다가에 널려진 사람들이 파도가 소리치며 밀려들 때마다 숨을 쉰다고, 물을 내뿜는다고 세번네번 다시 촬영할 때 인정사정을 모르는 그 <다시!>라는 소리가 정말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싫었습니다.》 《그랬을거요. 어떤땐 예술적계발로는 안될 때가 있거든. 그래서 억지다짐으로 그런 강요를 하게 되지. 그건 다 자기 무능을 스스로 드러내보이는 바보짓이요.》 한기석이 싱그레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출가동지, 안되겠습니다. 정말 안되겠습니다.… 너무 고지식합니다. 이런 기쁜날에 흉을 봤을게 뭡니까? 연출가동지가 연출을 시작해서 영화를 몇편이나 만들었는가 꼽아보다가 연출가동지 예술년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한테 무슨 년조라고 할게야 있나?》 《그러지 말고 언제부터 어떻게 영화를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나 들려주십시오. 언제 물어봐야 이야기를 안했는데 오늘이야 기쁜날이 아닙니까. 한턱 쓰는셈치고… 후에 내가 혹시 연출가동지를 회상하여 무슨 글이라도 쓰게 될지 압니까. 인간, 예술가로서의 연출가동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최승진은 혼자라면 몰라도 로영무까지 곁에 앉아있으니 더욱 어색해졌다. 《시시한 소리말구 마시기나 하게.》 《아- 그러지 마십시오.》 《겸손이 아니라 사실상 나한테는 회상이라고 할만한 이야기거리가 없네.》 로영무가 입을 열었다. 《피끓는 호기심이 탐험가 마젤란을 낳았다는 소리도 있다는데 막무가내로 그래서는 저 친구들을 당해내지 못할것 같구만… 내가 좀 이야기할가… 승진연출가가 영화예술에 뜻을 둔건 기석동무랑 밥상밑에서 기여다니던 그 시절 이야기일지도 몰라. 말하자면 왜정때지. 조선영화의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라운규선생이 비명에 요절하자… 그 요절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밑에 신음하던 우리 조선예술인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그런 비참한 죽음이였어. 선생이 없자 청년영화인들은 마음속의 기둥을 잃은거나 같은 신세로 되여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네. 개중에는 혹시 일본에 건너가면 영화예술의 기법이라도 배울수 있지 않을가 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파도사나운 현해탄을 건너간 청년들도 있었는데 승진연출가도 그런 청년들중의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네.》 로영무는 이런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후날 자기 벗을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되겠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취흥에 떠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본도꾜에 있는 일본대학이라고 하는 사립대학의 예술과에 겨우 입학해서 고학을 했지… 가만 그 대학이 도꾜 어디에 있었다구 했더라?》 하고 로영무가 최승진을 돌아보자 그는 괴로운 회억에 잠긴듯 이마살을 찌프리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채 나직이 뇌이였다. 《대학 본교사는 도꾜 간다구에 있었구… 예술과는 이께부꾸로에서 지상철도로 샤꾸지공원행 전동차를 타고 한참 가서 에고다… 에고다라는 교외의 음침한 거리에 있었지…》 그의 목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들리였다. 그는 갑자기 열물같이 쓰거운것이 묵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듯 입술을 이그러뜨렸다. 《돈이 없어 고학을 하자니 별의별 고생을 다 했소. 다다미 석장짜리방을 세내서 자취하면서 신문배달, 우유배달, 요꼬하마항에 나가 화물선에서 석탄을 부리는 일… 그때 돈으로 200원이 넘는 엄청난 수업료를 학교 서무과에 물지 않으면 제적당하니까 별수 없었지. 그 시절에 읽은 한 조선시인의 시가 생각나. 먹었는가 묻지 말라 굶었는가는 더욱 묻지 말라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내 신세가 바로 그랬네. 어떤때는 3전짜리 설렁탕도 사먹지 못했으니까. 나중에는 인분청소부노릇도 하고 제일 치사한 얼음장사, 말하자면 얼음세부판매라는것까지 하게 됐네. 얼음세부판매라는게 어떻게 하는건지 아는 사람이 없을거네. 바위같은 얼음덩이를 도매상한테서 넘겨받아가지고 그걸 톱으로 잘게 켜네. 벽돌장만큼 혹은 더 작게… 그다음 그것들을 니야까라는 손수레에 싣고 음식점이나 매춘가의 창녀들한테 파는거네. 도매상한테서 넘겨받을 때 도꾜의 그날 기온에 따라 운반도중 더위에 얼음이 얼마나 녹아내리겠는가 타산해서 그 감모량을 정하고 그만큼 값을 내려주는데 손수레를 끌고 빨리 달려 운반시간을 단축하는데서 리익금이 나오는셈이지. 결국 내 다리가 얼마나 빨리 놀려지는가에 달려있네. 굼뜨게 달린다든지 교통순사한테 잡히거나 인파속에 들어 어물대다가는 얼음이 다 녹아 밑지는 판이요. 그래서 도꾜의 그 무서운 불볕밑에서 매일 땀으로 미역을 감으며 신쥬꾸거리, 아사꾸사거리로 죽기내기로 뛰여갔지. 한푼이라도 더 벌자구… 해방후에 여기 촬영소에서 첫 체육경기대회가 있었을 때 나는 남자 3 000m경기에서 일등을 했는데 응원하던 동무들이 모두 달려들어 나를 공중에 들어올리고나서 너무 대견하고 희한하여 내 딴딴한 다리를 주물러보며 이전에 륙상선수로 지낸적이 있었는가고 물었네. 나는 겉으로는 웃어댔지만 속에선 눈물이… 피눈물이 떨어졌네… 얼음장사이야기를 더 하면 한번은 내 얼음을 산 음식점에서 소동이 벌어졌네. 손님이 받아놓은 빙수그릇속에 떠있는 얼음덩이안에 죽은 벌레가 얼어붙어있었거든. 이튿날 얼음을 팔러 다시 찾아가자 음식점주인놈이 짐승처럼 사나와져 손수레를 뒤엎어놓고 발길질로 얼음을 산지사방으로 차버리고 뭇매질을 하면서 이제부터 소문이 거리에 쫙 퍼져 손님들이 오지 않아 문을 닫게 됐다고 하며 손해배상을 하라고 을러멨소. 내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네. 그때의 치욕감을 무슨말로 말해야 될지. 아하 참… 그러루한 일이 있을적마다 고향으로 돌아오고싶었지만 이…이 가슴에서 타번지는 향학열때문에 또다시 얼음수레를 끌거나 신문배달노릇을 하게 됐지. 그때 일본에서는 돈만 있으면 공부하기 헐했거든. 출판업이 괜찮게 발전해서 책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서점가에 나가면 없는 책이 없었네. 호화장정의 세계문학전집들, 예술, 철학, 종교, 경제학… 돈만 있으면 아무 책이나 다 살수 있었지. 나는 맑스주의 서적도 거기서 사서 읽었소. 아마 그 시기 우리 고학생들을 통해 숱한 맑스주의 서적들이 건너왔을거요. 대학의 교수진도 그만하면 강한 편이였고…》 《그랬습니까.》 한기석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본에는 일찌기 세계 각종 사상조류들과 예술조류들이 다 들어와있었네.》 한기석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우리 세대는 안되겠습니다. 본것도 적고 체험도 적고… 한 음악평론가는 이렇게 썼더군요. 교향곡의 심각한 극성은 작곡가자신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체험했거나 상상한 심리정서적드라마의 표현이다… 연출가동지가 만든 작품들에 극성이 그처럼 강한 비결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런 체험이 없지요. 우리 사회제도에서야 어디 그런 체험을 할래야 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안되겠어요.》 최승진이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공연한 개탄이지. 위험한 생각이요. 불행한 인생체험에만 극성이 있는건 아니요. 행복한 체험에도 심각한 심리정서적인 극이 있소.》 한기석이 갑자기 저가락을 빈 접시우에 던지였다. 《연출가동지! 이러나저러나간에 당신들은 영화예술이란 이 길에 들어서서 다 대성을 했단말입니다. 이제는 일가견을 이루고 세상이 다 아는 작품들을 수태 만들지 않았습니까!》 국수대접들이 놓인 다반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던 윤희가 무슨 언쟁이라도 생기지 않았는가싶어 주춤 멎어서며 놀란 눈으로 한기석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도대체 뭡니까. 언제까지 의상궤짝이나 메고다녀야 합니까? 연출가동지네 세대는 벌써 20대에 작품들을 맡아 연출했고 자기 영화들을 통하여 세상에 다 알려졌습니다. 물론 준비된 자질과도 관계되겠지만… 그때 우리 나라에 연출가가 통털어 두세명밖에 없는 사정과도 관계된다고 봅니다. 지금은 수많은 연출가들이 과학원 원사들처럼 관록을 가지고 자리에 틀고앉아있기때문에 새싹은 솟아날 틈새기가 없습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연출가들은 우리 후대들을 생각해줘야 합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예술위원회앞에서 우리 기량을 보증해주면 우리한테도 작품을 맡겨줄게 아닙니까. 이 철룡이만 봐두 그렇습니다.》 한기석은 철룡의 어깨에 손을 다정하게 얹고는 말을 계속했다. 《부연출을 몇년이나 했습니까. 강철룡이가 왜 강고민이 됐겠습니까?》 최승진은 한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몸을 뒤로 젖힐사하며 껄껄 웃었다. 《이거 공격이 대단하군. 약속하오. 약속하지. 그런 보증은 언제든지 서줄수 있소.》 그 말에 신명이 난 한기석이 맥주고뿌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손등으로 맥주거품이 흘러내렸다. 《자. 그럼 그 약속을 위해!》 그들은 떠들썩하게 마셨다. 로영무는 취기가 벌겋게 오른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우리 영화를 가지고 외국에 나가본 사람은 승진연출가하고 나밖에 없는것 같은데 국경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조국의 명예를 걸머지게 된단말이요. 외국관객들은 한편의 영화를 통하여 그 민족의 사상감정과 정신미, 풍습, 지어는 국력까지 느끼네. 외국에 나간 한편의 영화는 분명히 그 민족의 사상감정의 사절이나 다름없지…》 식성이 좋은 친구들까지 안주를 집는것을 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작년 모스크바영화축전때 일이요. 축전장소인 한 영화관에서 우리 예술영화를 상영했는데 필림 서너권이 돌아간 다음부터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소. 그러다가 여기 저기에서 여러명씩 움쭉 움쭉 일어나 통로를 따라 우르르 밀려나갔소. 영화가 다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얼굴을 들수 없었소. 몸이 식은땀에 젖어있었소. 조국과 우리 민족정신, 우리 사상감정이 외면과 배척을 당한것 같으면서 정말 죽고싶도록 괴로웠소. 정신없이 복도로 나왔는데 무테안경을 코등에 걸고 재빛 수염이 텁수룩한 녀석이 사람들속을 비집고 나한테로 다가와 례절바르게 인사하고는 자기 소개를 했소. 프랑스연출가라고… 그리고는 <당신네 나라는 맑은 아침의 나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오늘 은막에서 보니 비도 자주 오고 하늘도 늘 흐려있는 아주 어둑한 나라이군.> 하면서 이죽거렸소. 최신형의 영사기에 우리 필림을 걸고 돌리니 낮은 현상수준이 그대로 드러나 은막에 비쳐진 화면이 비가 오는것처럼 보였던거요. 나는 그자의 비양까지 받자 모욕감과 울분이 터져올라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쥐였소. 통역원이 내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생겼을지 모르오. 나는 사실 이 수치스러운 일을 이때까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댔소.》 한기석이와 몇몇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쳤다. 《축전에 나갑시다!》 《봉창을 합시다!》 《<광풍>으로 사나운 바람을 일으킵시다!》 그 무슨 괴로움이라도 묵새기고있는듯 한손으로 이마를 싸쥔채 잠자코 앉아있던 철룡이 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최승진을 지켜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출가동지, 무엄한 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의 연기는 과장됐습니다. 때문에 오늘 터져오른 박수갈채에 비하면 영화가 좀 손색이 있습니다.》 로영무가 난처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저가락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나직하게 핀잔의 소리를 하였다. 《그건 무슨 소린가…》 순간에 좌석의 공기가 식어버린듯하였다. 모두 아연해진 얼굴로 성공한 연출가며 불손한 도발자를 번갈아 돌아보는 가운데 최승진이 선배의 아량으로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처음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보는군. 헛허허…》 한기석이 그의 뒤덜미를 잡고 흔들어대며 껄껄 웃어댔다. 《강고민… 과시 강고민이야 하하하… 이런 강짜니까 미혜가… 미혜가 속이 탈수밖에 …》 철룡은 불꽃이 펑긋 이는 눈으로 돌아보며 기석의 손을 뒤덜미에서 홱 치워버렸다. 그바람에 빈 맥주병이 넘어져 방바닥에 딩굴었다. 그때 윤희가 국수그릇들을 들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5 최승진의 집에서 나온 강철룡은 전차정류소쪽으로 곧바로 걸어나갔다.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산뜻산뜻 스치였다. 한기석이 뒤따라와 그의 팔을 끼였다. 《여 철룡이, 성났댔는가. 그쯤한 롱담에… 졸장부야. 천하에 졸장부라니까. 동무가 술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릴 하니까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이… 분위기를 돌리자구 그랬어. 정 용서안되면 내 눈판에 엎드려 절을 하지. 절을…》 술에 잔뜩 취한 한기석은 비틀거리면서 눈길에 엎드리려고 했다. 철룡은 그를 끌어올리며 언짢게 소리쳤다. 《자, 자, 빨리 가자구!》 둘은 서로 붙안고 걸어갔다. 《철룡이, 그래두 나만한 벗이 없는줄 알라구. 이자 오면서 보니까 미혜네 집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더군. 동무가 승진연출가네 집에 왔다가 들리지 않을가 해서 기다리는지도 몰라.》 철룡은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중층한 아빠트의 모든 창문들에 어둠이 서려있었으나 유독 최승진이네와 장미혜네 창문들에서만 불빛이 환히 흘러나오고있었다. 《가라구 가. 오늘밤에 아예 결판을 내라구 결판을… 어머니도 없겠다. 남아장부가 한번 마음먹으면 다지 그냥 질질 끌기만 하겠나.》 철룡은 취기때문인지 미혜가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처녀의 윤이 흐르는 머리칼, 그윽하게 빛나면서도 쌀쌀한 빛이 서려도는듯한 동실한 눈, 맑은 웃음소리… 모든것이 그리워났다. 《발동이 안걸리는 모양인데 자, 내가 불도젤이 돼서 떠밀어주지.》 한기석은 철룡의 배에 머리를 박고 기운껏 떠밀었다. 《부르릉…》 철룡이 문을 여니 미혜는 기겁한 얼굴로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니…》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소리도 없이 홱 돌아서 세면장쪽으로 가버렸다. 철룡은 어정쩡해서 문밖에 서있다가 제발로 들어갔다. 그는 미혜의 방 창곁의 책상앞에 마주앉아 처녀가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미혜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면장쪽에서는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빨래질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그 소리가 물이 아니라 시간이 철철 흘러버리는 소리로 들렸다. 미혜의 어머니가 병치료때문에 강서료양소로 떠나가자 그는 될수록 처녀만 사는 이 집으로 자주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동네사람들속에서 미혜의 얼굴을 깎아내릴수도 있고 또 방종한 놈팽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공간을 노리는 소행인것 같아서였다. 그의 자존심이 잦은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철룡은 비로소 누구의 몇마디 소리에 속이 흔들려 여태 지켜온 절제를 허물고 이런 밤중에 그것도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였다. 미혜도 그래서 불쾌해진것이 분명했다. 서가에 가쯘하게 꽂혀있는 책들과 원탁우에 나란히 놓인 분장도안들, 화분밑에 깐 정갈한 꽃수받치개, 알른거리는 장판… 방안의 모든것들이 자기 예술을 사랑하고 성품이 단정한 처녀의 정신적면모를 보여주는듯하였다. 철룡은 미혜가 들어오지 않는것이 전혀 고깝지 않았다. 오히려 자책감이 들며 기다리는 사이에 머리가 맑아지는듯하였다. 그는 마음같아서는 일어서 나오고싶었으나 그럴수도 없어 앞벽에 붙어있는 사진액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액틀속의 약간 퇴색한 사진에서는 한창시절의 아름다운 녀배우 리명선이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빤빤히 깎은 딸 미혜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있었다. 그것은 미혜의 백날사진이였다. 제대군인의 순박한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철룡이 처녀를 따라 이 집으로 처음 찾아왔을 때 미혜는 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어머니, 이건 장미혜동지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분장실에서 나서 분장실에서 자랐다고 해요. 호호호… 아무데서나 생활적이 못된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저만큼 생활을 사랑하고 생활적인 녀자도 드물거예요.》 철룡에게는 그 말이 여간 재미나고 뜻깊게 들리지 않았다. 어릴적에는 물론 군대복무기간 영화에 그토록 마음이 팔려있으면서도 이름난 녀배우 리명선의 딸과 운명적인 인연이 맺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철룡은 그날 이 방에 처음 들어서서 자기가 성장한 농민가정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생활체취에 가슴을 울렁거리며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리명선의 손때가 배여있는듯한 양복장들이며 삼면거울이 붙은 크고 번쩍거리는 경대, 품위있는 무늬가 그려진 창가림, 방구석에 세워진 무희의 목각상,… 보는것마다가 예술적향기를 풍기고있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었다. 강철룡은 군대에 복무할 때 련대의 젊은 군관들이 결혼식을 한다든지 그들에게로 약혼녀가 찾아온날이면 자기에게도 언제인가는 저런 날이 올것이며 그리고 절대 범상하지 않고 어떤 비상한 인연을 통해서만 사랑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감정이 움틀것이라고 공상했었다. 그러나 미혜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비상한 사연이란 없었다. 있었다면 일상적인 사업속에서 한가지 우스운 일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로 되여 뜻밖의 감정이 싹튼것 같았다. 그는 부연출로 배치되여 1년이 지나 력사물주제의 작품을 형상하는 한 제작단에 미혜와 함께 망라되여 일한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철룡의 눈에 비쳐진 미혜는 그저 한 분장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개성적인 미모로 하여 연출가들이 탐나하지만 배우의 성공과 관련된 그 어떤 유혹에도 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직무를 지키고있는 처녀였다. 제작단은 실내촬영장에서 몇장면을 찍고 곧 력사유적들이 많은 개성으로 가서 야외촬영을 계속하였다. 어느날 미혜가 촬영을 앞두고 선비의 수염을 잃어버렸다고 얼굴이 새까매져 돌아갔다. 온 제작단이 떨쳐나서 려관방들이며 야외촬영장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수염은 나타나지 않았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는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서 자기는 촬영이 끝난 다음 수염을 분장사한테 바쳤노라고 우겨댔다. 미혜는 그것을 받았다거나 받지 않았다거나 하는 소리도 없이 그저 울상이 되여 돌아갔다.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까짓 수염이야 하나 제꺽 새롭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처녀를 위로하였다. 미혜는 그 소리를 분장미술에 대한 홀시로 받아들였던지 발끈해졌다. 창작이 계렬식생산인줄 아느냐고 쏘아붙이면서… 무슨 수를 써도 잃어버린것과 꼭 같은 수염은 절대 만들어낼수 없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보통수염도 아니고 좌천되여 초야에 묻혀버린 절개굳센 량반의 고결한 성품과 그 허전한 인생의 슬픔을 표현하는 형상세부이기때문에 자기가 한달동안이나 고심하여 창작한것이라고 하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방도를 모색하다가 개성에 작중인물인 선비와 비슷한 용모의 로인들이 있을수 있는데 그들을 잘 설득하여 수염 몇오리씩 잘라오자는 안을 내놓았다. 제작단장은 모두 정신들이 있는가, 구습에 완고한 이 지방에서는 절대 그렇게 할수 없다고 엄하게 꾸짖었다. 제작단은 촬영을 중지하는가 마는가 하는 난처한 궁지에 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철룡은 그 수염이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제야 이틀전일이 생각났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가 점심시간에 촬영장곁의 간이식당에서 숟가락질하기 거치장스러운 수염을 식탁에 떼놓고 식사하고는 그냥 나갔는데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철룡은 그때 작품의 전반적인 조화와는 관계없이 자기에게 대사화면을 몇개 더 달라고 요구하는 주인공배우와의 론쟁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 일을 까마득히 잊었던것이다. 수염을 분장사에게 넘겨준 다음 연출가는 기쁜김에 철룡의 어깨를 툭 치며 공연히 처녀를 울렸다고 하면서 과시 강고민이라고 웃어댔다. 철룡은 처녀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촬영의 전기간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도와주었다. 영화가 세상에 나간 다음 그는 신수사납게도 여름감기에 걸려 합숙에 누워있게 되였다.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던 미혜가 문병와서 반시간가량 앉아있다 갔는데 밤에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한달후 그들은 남다른 사이로 되였다. 그때 철룡에게는 사랑이란 누구도 없는데서 둘이 함께 있고싶은 감정이고 욕망이였다. 그래서 휴일이나 명절날이면 처녀를 끌고 사람들의 눈을 멀리 피하여 교외의 숲속을 돌아다녔다. 미혜는 까다롭게 굴지 않고 순순히 응하였다. 늦어서 첫 사랑을 체험하는 제대군인의 끝없는 열정과 처녀의 순진하고 장난기 심한 마음은 한데 어울려져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별의별 환락을 다 궁리해냈다. 철룡이 까마득한 살구나무로 기여올라가 가지를 마구 흔들어 열매를 털면 처녀는 밑에서 좋아라 손벽을 치며 돌아치면서 그것들을 주어모았다. 《선물찾기》를 시작하여 철룡이 수풀속을 돌아치다가 나리꽃 한송이를 꺾어가지고 뛰여가서 처녀에게 선물로 내밀면 미혜는 등뒤에 감추었던 밥알꽃송이를 보란듯이 내미는것이였다. 철룡이 싸리버섯을 내밀면 처녀는 어느새 어디서 땄는지 참나무버섯을 내밀었다. 철룡이 돌쪼각을 내밀면 미혜는 모래 한줌을 내밀었다. 나리꽃과 밥알꽃, 싸리버섯과 참나무버섯, 돌쪼각과 모래 한줌… 보지 않고도 맞아떨어지는 이런 류사한 일치가 너무 신기하고 기뻐서 행복감에 한껏 도취된 둘은 풀밭에 가지런히 누워 나무가지들사이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미래를 공상하였다. 공상속에 그려지는 그들의 미래는 영화연출가와 분장예술가의 조화로운 가정이였으며 보람찬 창조생활이였다. 철룡은 공상에 잠겼다가도 아이들처럼 천진란만해져 힘살이 꿈틀거리는 팔뚝자랑을 했고 미혜는 살결고운 팔에 도드라진 두개의 우두자리를 보이며 자기 몸에는 이 두개의 상처밖에는 없다고 자랑하였다. 때로는 공연한 트집을 걸어 다투기도 하였다. 때로는 예술적인 문제를 가지고 열이 나서 론쟁도 하였다. 철룡은 미혜와의 공통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하여 미술사를 부지런히 공부했고 미혜는 철룡의 마음에 더 들려고 그의 식성에 따라 매운 음식도 꺼려하지 않고 먹다가는 입을 싸쥐고 맴돌이쳤다. 철룡은 그것이 재미나서 큰소리로 웃어댔고 미혜는 그런다고 주먹으로 그의 잔등을 콩당콩당 때렸다. 철룡은 언제인가 구라파의 한 시인이 사랑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거목의 뿌리를 붓으로 삼아 저 하늘에 가득 <내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써놓고싶다고 노래한 시를 읽고 너무 표현이 과장되였다고 비난한적이 있었는데 지금에는 그 심정이 어느정도 리해되였다. 그는 하늘에는 글을 써놓고싶지 않았지만 땅에는 사랑의 표적을 남기고싶었다. 그래서 미혜가 무척 좋아했고 그 시절 어느 식료상점에나 흔해빠졌던 칼피스를 여러병 사들고 길을 떠났으며 그것을 마시고는 빈병을 땅속에 깊이 박아넣으면서 미혜더러 20년이나 30년이 지나 이자리에 다시 찾아와서 오늘을 추억하자고 했다. 한번은 처녀가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 철룡은 그 물음에 당황해져 잠시 망설이다가 기지있게 대답했다. 미혜가 이슬로 될수 있다면 그를 늘 눈에 넣고다니겠노라고… 처녀는 전률이 오는듯 몸을 떨며 한번 이슬이 되여봤으면… 하고 탄식했다. 빈병은 모란봉의 숲속에도, 대성산 기슭에도, 장수산 중턱에도 묻혔다. 그렇게 병들을 묻고나면 그 산들이 모두 사랑의 증견자, 사랑의 기념비로 느껴졌으며 그 산들이 허물어져 없어지지 않는 한 자기네 사랑의 약속도 허물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가슴에 바위처럼 들어앉은것이였다.… 침대우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검은 남자장갑이 눈길을 끌었다. 무척 눈에 익은 장갑이였으나 누가 저런것을 끼고다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미혜가 들어왔다. 처녀는 세타소매를 팔굽까지 걷어올려 시뻘겋게 드러난 팔에서 물기를 털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릿한 빨래비누냄새가 풍겨왔다. 처녀는 빨래를 성급하게 한탓인지 빨갛게 홍조가 타오른 얼굴로 숨소리를 쌔근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나는 묵은 빨래를 둬두고는 잠도 못자요. 그리고 처벌이였어요. 밤늦게 술마시고 찾아온… 정신이 좀 맑아졌어요?》 철룡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저녁 승진연출가동지네 집에 모였다지요? 잘 놀았어요?》 《괜찮았소.》 《전 촬영때문에 남아있었는데 모두 퇴근한 다음 박경섭동지로부터 부총장동지한테 전화가 왔어요. 수령님께서 영화가 좋다는데 어서 보고싶다고 하셨대요. 얼마나 좋을가…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어떤가?》 (저건 한기석이 장갑이다. 틀림없어. 그의 장갑이 어떻게 여기와 있는가?) 촉기빠른 미혜는 그의 눈길이 흘깃 갔던데를 돌아보더니 그 장갑을 쥐여들어 무릎우에 올려놓으며 한기석이 장갑이라고 했다. 《코가 터져 손가락이 나오게 됐어요. 기워주자고 가져왔어요.》 철룡은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와졌느냐고 묻자다가 처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가봐 그만두었다. 《한가지 물어보면 솔직히 말하겠소?》 《내가 언제 솔직하지 않은적이 있어요?》 《기석동무한테 무슨 소릴 한적이 있소?》 《아니… 무슨 소린데요?》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거나 속이 탄다거나 그러루한…》 《그가 뭐라고 해요?》 《그저 그러루한 소리요.》 《어마나, 그래서 이 밤중에 찾아왔군요. 호호호… 어린애처럼… 언제 철이 들가… 자기가 이전에 나한테 말하구서… 맑은 호수를 보면 누구나 돌이나 흙덩이 같은걸 던져보고싶어 못견딘다고… 어떻게 흐려지는가. 어떻게 파문이 이는가 보고싶어서…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 알고싶어서… 그래서 자그마한 흙덩이를 던졌겠는데 뭘 그래요.》 철룡은 어줍게 웃었다. 《아니, 그래 온건 아니요.》 처녀는 눈을 곱게 흘기였다. 《철룡동무… 기석오빠하고 사이좋게 지내요. 엄마하고 그의 아버지하고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고 부모들의 그 인연때문에 우리도 좀 가까와요. 약간… 가까이 지내겠어요?… 싫어요?… 싫으면 좋도록 해요.》 《싫고 좋고가 있는가, 같은 부서, 같은 부연출인데… 우린 가까운 사이요.》 《그래도 싫어하는것 같은데요… 좋아요. 우리는 국가들의 관계처럼 벗의 원쑤는 나의 원쑤다, 벗의 벗은 나의 벗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련대성의 부담을 지지 말자요. 개인들사이에 그런다는건 좀 별스럽지 않아요?》 《아니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미혜가 좋아하면 그만큼 우리들사이는 멀어지오.》 《아이, 꼭자다…》 미혜는 무릎우의 장갑을 침대머리쪽으로 던져버리고는 탄력있게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처녀는 한손으로 책상모서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습관된 체취가 뭉클 안겨들었다. 《철룡동무…》 처녀는 살뜰한 정을 담아 나직이 속삭였다. 《어째 나를 산속으로만 끌고다녀요?》 《그게 싫소?》 《싫은건 아니지만 남들이 다 하는것처럼 하고싶어요.》 《남들이…?》 《어째 집에 가자는 소리는 한번도 안해요?… 남들이 다 하는것을…》 (남들이… 남들이… 남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랑다음에는 약혼… 다음엔 결혼…가정…) 《형님이랑 형수님한테랑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히구싶어요.》 그것은 기다리고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던것이였다. 행복감에 가슴이 터지는듯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감이 엄습해들었다. 철룡은 의자를 뒤로 밀어버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굽실굽실 흘러내린 처녀의 윤나는 머리가 가까이에서 향기를 풍겼다. 《우리집에 가고싶어?》 미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말아요… 얌전하게 굴게요.》 철룡은 처녀의 따뜻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미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느냐?》 둘은 화닥 놀라 물러섰다. 미혜는 황황히 복도로 뛰여나갔다. 《아이, 엄마, 어떻게 이런 밤중에…?》 《료양소에서 여기로 오는 차편이 있어서 떠났다.》 《거기 약수가 맞아요?》 《모르겠다. 꼴을 보려마.》 《얼굴이 좀 좋아진것 같은데요.》 《좋아지긴…》 미혜가 무엇이라고 귀속말로 속삭이는것 같더니 걸어들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보통아낙네들의 나들이차림처럼 수수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리명선이 방안에 꼿꼿이 서있는 철룡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놀라운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총각의 인사에 린색한 미소로써 대답했다. 《너무 늦었구만…》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문앞을 지나 웃방으로 들어갔다. 미혜가 따라들어가 소곤소곤 변명하는 소리가 나더니 리명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해한다. 리해해…》 《승진아저씨 작품이 시사회에서 대절찬을 받았어요. 그래서 연출실에서랑 그 집에 다 모였더랬어요. 축하하러…》 《그래?… 그렇게 걸작이냐? 아유- 이제야 우리 영화계에 볕이 드는 모양이구나… 료양소에서는 이제 돌아가면 사직해서 년로보장에 넘어가자고 마음먹었더랬는데…》 《엄마, 이런때 왜 사직하겠어요. 그런 생각 말아요.》 철룡은 그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등골에 식은 땀을 느끼며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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