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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우리자신보다 더

우리는 그대를 믿노라, 당이여!

그대가 우리를

우리보다 더 믿고 사랑했기에

 

우리자신보다 더

우리는 그대를 아끼노라, 당이여!

우리의 숨결이 그대 숨결에 닿아있기에

우리의 혈맥이

그대의 심장으로 뛰고있기에…

 

ㅡ서정시 《우리 당》중에서ㅡ

제 1 장

 

1

 

 방안도 부엌간도 대낮처럼 환했다. 

윤희는 단란한 가정살림의 아늑한 고요를 한껏 즐기며 동자질을 하다가 저도모르게 마음이 끌려 천정의 형광등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년전만 하여도 대통로들과 대동강유보도의 가로등이나 동상과 기념비들의 장명등으로 켜져 수도의 야경에 운치를 돋구던 형광등불빛은 어느새 대도시를 은백색의 휘황찬란한 불빛바다로 만들고 시가유축의 영화예술인아빠트에까지 들어와 그의 집부엌도 이렇게 밝아진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는 조국이 보내주는 그 희한한 불빛은 윤희의 가슴속에 한가득 흘러들어 마음의 구석구석을 환히 밝혀주는듯했다. 

그는 행복감에 겨워 미소를 머금고는 가볍게 돌아치며 동자질을 계속하였다. 둥실한 어깨며 청춘이 약동하는 봉긋한 젖가슴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게 몸을 감싼 연한 미색세타에 흰 모직양복치마를 받쳐입고 그우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그 녀자는 아직 생활의 쓴맛 단맛에 때묻지 않은 새색시같았다. 

윤희는 희고 매츨한 손으로 늄밥가마꼭지를 약간 쳐들고 머리를 갸웃하며 확 피여오르는 밥김냄새를 맡아보고는 얼른 손을 귀에 가져갔다. 얼굴에 끼얹힌 밥김때문인지 볼에 연한 홍조가 피여올랐다. 

그는 인차 돌아서서 랭장고문을 열고 파며 닭알, 고기 등을 조리대의 칼도마우에 꺼내놓았다. 그것은 시사회와 최종합평회를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낮에 식료상점에 가서 사온것들이였다. 윤희는 연출실의 다른 연출가들이나 배우들도 축하하자고 밀려들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경우 남편이 옹색을 당하지 않도록 술과 맥주도 몇병 사왔는데 그것으로 모자라지 않을가싶은 불안도 없지 않아 두손을 앞치마속에 감추고 오도카니 서서 찬장안에 세워둔 병들을 눈어림으로 세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질풍처럼 휩쓸어드는 불길한 생각에 입술이 파랗게 질리였다. 

지난밤 남편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 2시경 윤희가 잠결에 까닭없이 가슴이 서늘해져 서재로 황황히 올라가니 남편은 어스름속에서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피우며 침대머리에 앉아있었다. 왜 주무시지 않는가고 묻자 놀라서 그를 쳐다보며 어서 내려가 자라고만 일렀다. 윤희는 그런 남편을 어둠속에 홀로 둬두고 자기만 내려가 잘수 없었다. 남편의 성공과 기쁨은 그의 성공이고 기쁨이였으며 남편의 실패와 번민은 그의 실패, 그의 번민으로 되여야 했다. 남편의 모든것이 그의것이였다. 

윤희는 가늘게 새여나오는 한숨과 함께 남편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한손을 꼭 잡아쥐여 자기 가슴앞으로 끌어왔다. 

최승진은 안해에게 손을 맡긴채 한숨섞인 나직한 목소리로 영화연출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직업같지만 사실은 세상에서 속을 제일 많이 썩이는 고달픈 직업인것 같다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을 더 느끼게 된다고 했다. 

《한 예술가가 자기 경지를 개척해나가자면 한평생 쉬임없이 땅을 뚜지는 근면한 농군처럼 말이요, 하루도 쉬임없이 탐구에 탐구를 계속해야 되오. 그러자니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희생시켜야 하거든. 나를 보라구. 이번 작품을 걷어안은 다음 언제 한번 당신과 살뜰한 시간을 지낸적이 있나, 극장이나 식당에 한번 같이간 일이 있나. 창조하는건 예술이지만 개인생활은 전혀 예술적이 아니란 말이요. 당신한테야 내가 얼마나 재미없는 남편이겠소.》 

윤희는 어리광부리듯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소리 말아요. 고생이 락이란 말도 있지 않아요.》

《고생이 락이라…》

《한가지 물어도 좋아요?》

《음…》

《그럼 어째 젊어서 이런 고생스러운 길에 들어섰어요? 세상에 하많은 직업가운데서 어째서 이런 길에…》 

《그건 좀 복잡하고 심중한 문제요. 후에 죄다 이야기해주지.》 

《또 한가지… 이런 길에 들어선걸 지금에 와서 후회하게 되나요?》 

《아니 여태까지 단 한번도 후회한적은 없소. 그저 당신이 곁에 오니 마음이 좀 약해져 하소연했을뿐이요. 다른 사람에겐 한번도 고생타령을 한적이 없소.》 

《여보, 솔직히 말씀해줘요. 이번 작품이 자신없어요?》 

최승진은 1년남짓하게 걸려 다부작 광폭예술영화 《광풍》을 창작하였다. 문화성과 촬영소는 영화예술계의 한 기둥이라고도 할수 있는 그의 재능과 능력을 믿고 막대한 자금과 물자를 투자하고 유능한 인민배우, 공훈배우들을 다 들이밀고 수백수천의 찬조출연인원들과 군중들을 동원했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중앙의 신문과 방송기자들이 찾아왔었고 영화계의 여론은 이 영화제작이 우리 나라 영화사에 하나의 사변으로 기록될것이라고 했다.

 최승진은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였다. 

《글쎄 뭐라고 할가… 나는 오늘밤 다시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장면 한장면 죄다 더듬어봤소. 어떤 대목은 두번 세번…》 

《그럼 잘됐는지 못됐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자기가 낳아키운 자식을 밉게 보는 어머니가 있소? 연출가도 누구나 다 그렇단말이요. 게다가 나는 남달리 주관이 센 사람이 아니요. 시사회를 앞둔 지금에 와서는 내 감각, 내 판단을 전혀 믿을수 없게 되였소.》

《어제 부연출아저씨가 와서 잘됐다고 하던데요.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졌어요. 쉬라요. 다 잊고 푹 쉬라요.》 

윤희는 지난밤 그토록 불안해하던 남편의 말들이 떠오르자 다리맥이 풀려 두손으로 볼을 싸쥐고 오도카니 앉아만있었다. 

출입문쪽에서 손기척소리가 나는것 같더니 문이 열리며 시원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니 이 집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이웃현관에 사는 연출가 로영무의 안해가 투명한 비닐보자기에 푸르싱싱한 부루를 싸들고 들어왔다.  

윤희는 반색을 하며 달려나가고싶었으나 인차 마음을 돌릴수 없어 그저 어정쩡한 얼굴로 일어섰을뿐이다. 

박성녀는 그의 얼굴빛을 흘깃 훔쳐보고는 비닐보자기의 부루를 구석쪽의 소랭이에 말없이 쏟아놓았다. 그리고는 막내동생이나 며느리의 집에라도 온듯 대견해하는 눈빛으로 부엌안을 둘러보더니 혀를 찼다. 

《알뜰하게는 거두었구나. 저 찬장안엔 저게 뭔가? 에이구 술에다 맥주병까지. 원 손두 크구나. 온실농장에 있는 친척이 저걸 보내왔길래 승진선생 생각이 나서… 이 겨울철엔 저것두 귀한게라구. 내가 다 손질했으니 한번 찬물에 헤워 밥상에 올려놓으라구.》 

인정미도는 그의 말투며 푸르싱싱한 부루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기운으로 부엌간에 생활의 화기가 한결 더 도는듯했다. 

윤희는 못내 고마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저 《아니. 정말…》 하고 입안의 소리를 몇마디 하였다. 

《내 오기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나?》 

《그저 공연히…》 

《영화걱정을 했지?》

《…》 

《어쩐지 그러는것 같아 동무나 해줄가 하고 낮에 두번 찾아왔댔는데 없더구만.》 

《식료상점에랑 갔댔어요.》 

《음…》 

성녀는 남정들처럼 부엌간으로 들어오는 문턱에 턱 걸터앉더니 어조를 훈시조로 바꾸어 말했다. 

《이거 보라구. 내가 우리 령감하구 30년을 같이 살면서 터득한 인생철학이란게 뭔지 아나? 안팎이 다 영화풍에 춤을 추다가는 집안이 망태기가 된다는거네. 망태기가 돼. 저 령감이 글쎄 왜정때 이팔청춘에 꽃같은 나를 맞아들여서는 첫날밤에 한다는 소리가 영화를 하자면 세가지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거야. 굶어죽을 각오, 페병에 걸려 앓아죽을 각오, 매맞아죽을 각오, 하하하… 이렇게 세가지 죽을 각오를 꼽는데 제가 무슨 대연출가라도 될것처럼 그 기상이 얼마나 대단하겠어. 이 머저리는 그때 그 기상에 놀라 눈이 화등잔만해져서 숨을 죽이고 그 세가지 각오를 하나하나 캐여물어봤지. 왜 굶어죽어야 하는가? 영화가 안되면 수입이 없으니 입에 풀칠도 할수 없다는거야. 왜 페병에 걸려야 하는가? 생활이 고달프고 가난하니 몸이 약해져 페병에 걸리기 일쑤라면서 라운규선생도 페병에 죽었다는게 아니겠어. 왜 맞아죽어야 하는가? 영화에 민족적색채가 진하게 풍긴다든가 독립사상이라도 좀 내비치면 사상범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 뭇매를 맞을수 있다는거야. 휴- 그 소리가 가슴에 못으로 박혔어. 그 소릴 들은 다음부터 신세가 고달파질 때마다 영화를 버리고 하다못해 리발소를 차리든지 넝마장사를 하던지 살아갈 궁리를 하자고 울며불며 애걸복걸했지만 끝내 저 령감을 영화에서 떼내지 못했지… 해방직후엔 또 뭐라구 했는지 아나? 집안일에서 내 손을 빌자는 생각은 아예 걷어치우라는거야. 자기한테 남편이 있거니 하고 생각일랑 말구 혼자사는 녀자처럼 집안일을 맡아달라는거야. 그때만 해도 한창 젊은 나이이고 시샘도 좀 할 때라 해방이 돼서 신수가 좀 훤해지니 어떤 바람쟁이년한테 정분이 난게구나 이런 옥생각이 덜컥 들어 왕왕 울면서 들이댔지. 어느년한테 정분이 났는가? 그게 어느년인가? 이름을 대라구 야단을 치니까 저 령감이 하는 소리가 정 이름을 알고싶으면 대주겠다면서 자기가 정분이 난 그 녀자 이름은 <영화>라는게 아니겠나. 예나 지금이나 자기 첫째 사랑은 영화구 당신은 두번째다 하구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아무데나 가고싶은데로 가라구 으르는게거든. 두번째 사랑… 그 소릴 들으니 정말 기막히구 섧더구만, 그래서 그땐 더러 응석도 부릴 때라 눈물을 한말이나 줴짰어.》 

풍상고초의 흔적이 력연한 성녀의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성녀는 치마자락을 들어 그 눈물을 닦고는 허거프게 웃었다. 

《저 아바이도 그때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지 나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달래였어. 

<여보, 나라에서 남사당패나 다름없던 우리 영화인들을 얼마나 잘 보살펴주고있소. 이젠 끼니걱정이야 아주 잊혀지지 않았소. 정말 채심해서 장군님 은덕에 보답해야겠소. 영화창작에 몸과 마음을 깡그리 바쳐야겠소. 내 그래 그러니 너무 섭섭해마오.> 이런 말까지 듣고보니 남편이 있거니 생각지 말라던 저 아바이 말이 전혀 그른건 아니더란 말이우. 다른 집들을 봐두 정말 진짜배기 예술가의 안사람은 다 두번째 사랑이라니까. 진짜예술가의 첫째 사랑은 예술… 예술이야. 이런 판에 안사람까지 예술에 맘이 팔려 속을 썩이면 집안일은 망태기야. 예술인집두 사람사는 집인데 살아가는 걱정이 왜 없겠나. 그 걱정을 다 도맡아서 집안살림살이도 알뜰하게 꾸려나가구 아이들도 잘 키우구 해서 바깥분들이 예술밖에 다른 잔걱정에 맘을 쓰지 않게 하는게 예술을 돕는게 아니겠나. 아무 기업소에나 후방부가 있는것처럼 우린 후방부서야. 이보라구. 천하에 영화처럼 아이로부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온세상 사람들 말밥에 오르고 시비에 걸리는게 어디 있겠나. 영화한편이 나오면 며칠새에 소문이 짜 돌고 눈이 있어 볼줄아는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한다니까. 어느 연출가가 만들었다, 어느 배우가 잘한다 못한다, 어느 배우네 집에 어떤 흉측한 일이 생겼다, 늘 이런 시비와 칭찬과 비난속에 사는게 우리지. 한번은 우리 아바이가 졸작영화를 냈는데 글쎄 그 영화가 돌아간 온 나라각처에서 비난이 터져올랐어. 함북도와 량강도, 자강도 산골에서까지 비판편지가 올라왔는데 우리는 1년이상이나 그런 편지를 받았다니까. 이러니 세상앞에 자기를 다 드러내놓고 사는게나 같지. 그래서 난 밖에 나가서는 언행을 여간 조심하게 되지 않아, 한평생 그랬지… 가만 내가 왜 이렇게 넉두리질만 하고 앉았어?》 

성녀는 움쭉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동자질을 한참 도와주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윤희는 밖에까지 따라나가 그를 바래웠다. 현관의 외등밑에서 헤여질 때 성녀는 그의 환한 모습에 눈이 부신듯 우습강스럽게 실눈을 짓고는 아래우를 훑어보고 정담아 잔등을 쓸어만져주었다.  

《아이구, 그렇게 차리니 새색시같구나. 밝은색으로 입으니 나이에도 어울리구 보기 좋은데 뭐가 무서워 나들이나갈 때는 늘 어두운 색으로 입고 다니나?》 

윤희는 자기와 남편 나이의 차이를 느끼게 되여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말았다.

 

 

 

 

 

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2

 

 

 윤희는 그 어떤 수치심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총총히 층계를 뛰여올랐다. 어찌하여 자기 일생은 이렇게 운명지어졌는가? 그는 처녀시절 동무들이 시가갈 때면 수집은 마음으로 자기도 저들처럼 나이 두세살 우의 상대의 품에 안기게 되리라, 이 세상 하늘밑 어디에선가 그런 상대가 매일아침 세수도 몸단장도 하고 일터에서 구슬땀을 뿌리며 일하거나 어느 학당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고있을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무릇 녀성들이 처녀시절에 다 그러하듯이 윤희는 행복에 대한 끝없는 공상으로 마냥 가슴이 부풀어있었으며 자기 용모와 성품, 자질로 보아 그렇게 못될 까닭이 없다고 남몰래 생각했으며 한껏 행복해질 자신이 있었다. 동무들은 리상적인 남성과의 결혼이야말로 녀성의 행복의 기초라고 말들 했으며 윤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꿈에도 한번 생각해본적 없는 상대, 나이 썩 우이고 게다가 희귀한 직업에 개인생활이 불우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다니… 이름있는 영화연출가의 생활이 담보해줄수 있는 괜찮은 생활조건때문인가. 그의 명예를 후광으로 삼아 동년배들한테 돋보여보자는 어리석은 허영심때문인가. 생활에서 늘 쓸쓸한 구석이 엿보인 그에 대한 동정심때문이였던가? 

영화연출가 최승진… 그 비슷한 사람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본적이 없는 윤희는 자기와 그의 결합을 늘 사랑이란 원래 년령차이나 속된 여론의 비난쯤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크고 열광적인 감정이기때문이라고 자기위안해 왔었는데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알수 없었다. 그저 분명한것은 자기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최승진이라는 사람을 알수도 없었을것이라는것이였다. 그를 영화계로 떠민것은 려객사업소 지령원인 사촌오빠와 몇해전 교원으로 있던 인민학교의 교장이였다. 배우처럼 잘 생긴 사촌오빠는 보기드문 영화광이였다. 그는 평양시내 모든 영화관들의 영화상영 일람표를 매달 수첩에 적어놓고 어느 영화나 빠짐없이 보았고 누구를 설복하거나 비판할 때에도 영화의 내용을 빌어 열을 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영화라면 오금을 못쓰는 위인이였다. 

어디서 무슨 좋은 영화를 돌린다는 소문만 들어도 전화를 거듭 걸어 알아보고는 장난군아이들처럼 직원들의 눈을 피해 몰래 사업소를 빠져나가 보고와서야 안착되여 다시 손에 일을 잡는것이였다. 그래서 직장에서 비판무대에 오른적도 한두번 있었다. 어떤 비판이나 봉변도 그의 영화열을 식혀낼수 없었다. 그는 영화와 아주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결의도 하고 진심으로 속다짐하여 자중하고있을 때에도 시내의 어느 맥주집에서 얼굴을 익힌 한 촬영소 배우와의 편지거래는 몰래 가지였다. 그는 촬영소의 한 말석배우와 안면을 익힌것을 무상의 행복으로 여겨서 그에게서 짤막한 회답편지라도 받으면 사랑의 편지를 받은 총각처럼 흥분하였으며 그것을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남몰래 거듭거듭 읽어보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자기생활의 무미건조함과 자신의 번민에 대하여, 최근 나온 작품에 대한 소감과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토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보내였다. 

영화에 대한 그의 이런 열중은 아무한테도 고백안했지만 자기가 영화예술인, 더 까밝히면 영화배우의 천분을 타고났다고 믿는데서 오는것이였다. 한번은 시내의 게시판들에 영화배우모집광고가 나붙었는데 그는 즉시 안면있는 그 배우에게 편지를 띄웠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이 며칠 휴가를 받아가지고 몰래 촬영소로 배우시험치러 갔다.  

눈치빠른 윤희는 오빠의 휴가목적과 행처를 인차 알아냈는데 그는 자기의 리상세계에 가서 어떤 랭대와 모욕이라도 당하고 왔는지 얼굴빛이 거멓게 질리고 기상이 험해져서 별치않은 일을 가지고도 식구들에게 역증을 터뜨렸으며 한달이 지나가도록 영화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바툼한 키에 성미가 내성적이고 근엄하게 생긴 윤희네 학교 교장은 진지한 영화애호가였고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영화평론가였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새로 나온 영화를 선참으로 보았으며 그 영화에 대한 제나름의 견해를 세워놓고야 안착되여 일하는 사람이였다. 그뿐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에 대한 자기 소감과 론평을 써서 영화예술사에 보내군하였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편집부는 단 한편의 그의 글도 실어주지 않았으며 의견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회답편지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어느날 한 녀교원의 결혼식에 모인 교원들이 취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는 침울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있다가 촬영소가 인민대중의 반영을 외면하고있기때문에 현실주제의 문제작을 내지 못한다고 하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뒤자리에 앉은 젊은 교원들은 그 소리를 듣고 《동 끼호떼야… 동끼호떼…》 하고 귀속말로 수군거리며 키득거렸다. 그때 윤희는 남자교원들의 어깨너머로 교장을 측은하게 지켜보았다. 그후 교원들속에서 돌아가는 말은 그가 영화에 원망을 품고 아예 인연을 끊은것 같다고도 하고 그런것이 아니라 무슨 궁냥에서인지 퇴근해 집에 가서 독학으로 영화연출공부를 한다고도 하였다. 영화는 그를 외면했으나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짝사랑처럼 눈물겹도록 뜨겁고 검질긴것이였다. 영화에 대한 교장의 이런 짝사랑과 사촌오빠의 열광이 윤희의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주리라고는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는데 그야말로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해 봄날 학교옆 좁은 골목길에서 영화장면을 촬영하게 되였던것이다. 봄볕에 얼굴이 까맣게 탄 부연출 한기석이 교장을 찾아들어와 찬조출연할 인원이 필요한데 인물이 말쑥한 녀교원 한명과 학생 5, 6명을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순간을 계기로 음성화되였던 교장의 영화열이 밖으로 터져올랐다. 그는 한평생 기다렸던 귀인을 만나기라도 한듯 뛰여일어나 부연출의 손을 덥석 잡아흔들었으며 그 자리에서 구역교육과에 전화를 걸어 허가를 얻은 다음 영화촬영을 보장하기 위한 교원협의회까지 열고 찬조출연인원들을 선발하였다. 녀교원들중에서는 윤희가 뽑히고 2학년과 3학년에서 각각 3명의 아이들이 불리워왔다. 교장의 영화열에 천진한 아이들의 호기심까지 겹치여 온 학교가 영화의 회오리바람속에 들어 대경사를 만난듯 떠들고 웃어대고 설레였다. 

찬조출연자들이 촬영한 장면은 간단한것이였다. 학교에서 쫓겨난 녀선생과 아이들이 뒤골목길의 어느 울담밑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쪽잠이 든 왜정때의 장면이였다. 촬영은 날이 어둡자 시작되였다. 윤희는 부연출이 시키는대로 헐어빠진 치마저고리를 갈아입고 누데기같은 옷차림의 두 아이를 량옆에 꼭 끼고 울담밑에 쪼그리고 앉아 쪽잠이 든 시늉을 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옆에 붙어누웠다. 

학교공부가 끝난지 오랜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골목길에 몰켜든 숱한 아이들이 왁짝 끓어번지는 가운데 교장이 지리교수용 지시봉을 휘저으며 촬영장소둘레를 왔다갔다하면서 아이들이 밀려나오지 않게 엄하게 단속을 하는가 하면 떠들지만 말고 예술이 어떻게 창조되는가 잘 봐두라고 이르기도 했다. 

조명빛이 눈부시게 비쳐들고 름름하고 의젓하게 생긴 중년의 연출가가 다가와서 찬조출연자들의 자태를 살피더니 무엇을 봤는지 아연해지는듯한 기색이였다. 그는 직업적이 아닌듯한 눈길로 윤희를 빤히 여겨보다가 홱 돌아서 담배를 피워물고 몇모금 성급히 빨았다. 윤희는 심상치 않은 그 거동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연출가는 촬영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가 최승진이였다. 

촬영은 일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윤희가 의상을 바치러 갔을 때 촬영기옆에서 교장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있던 부연출이 촬영이 아주 잘됐다고 칭찬하고는 직업적인 눈으로 그를 지켜보더니 연출가의 주목을 끈 개성적인 미모를 가진 동무가 이런 구석진 학교에 묻혀있기는 아깝다고 하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한숨을 내쉬였다. 교육자의 영예감에 가슴이 부풀어있던 윤희는 그런 말이며 한숨소리에 모욕감이 들어 반발하고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자제하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 한마디 말은 교장에게서 놀라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갈증만난 사람이 물그릇에 매달리듯이 부연출의 팔목을 덥석 잡으며 그럼 저 선생을 촬영소에 보내면 배우로 받아주겠는가고 물었다. 이튿날 교장은 당자의 의향은 물어도 보지 않고 사촌오빠를 찾아와 의논하고 구역교육과에 뛰여갔으며 사촌오빠는 땀을 철철 흘리며 촬영소에 두세번 다녀왔는데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의 성취못한 소원을 윤희를 통해서라도 실현해보고싶은 심정인것 같았다. 한달반 후 구역에서 윤희를 촬영소에 보내여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오자 그는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안가겠다고 버티였다. 그러자 사촌오빠는 처음에는 천하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느냐는듯 흰자위가 다 드러나도록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으며 다음에는 며칠을 두고 열기띤 목소리로 설복하였다. 교장도 같은 설복을 하였다. 그의 설복에 의하면 교원은 한학급의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지만 영화배우는 온 나라 인민들, 아니 온 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에게 고상한 인륜도덕과 사회적정의를 가르치고 연기의 매혹적인 감화력으로 량심과 선행, 영웅성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교사이라는것이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는 영화배우와 교원은 동업자나 다름없다는것이였다. 그리고 구석진 구역의 이름없던 이 학교에서 영화배우가 배출된다면 그것은 우리 학교의 영예이고 구역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 절절한 말에 윤희는 그만 마음이 움직이고말았다. 

한달후 그는 촬영소 배우단에 입직하였고 몇달간의 배우수업과정에 자신에게 영화배우로서의 남다른 소질이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으며 거기에 어려서부터 앓던 관절염이 도져 편집실로 옮겨앉게 되였다. 편집원들은 모두 녀성들이고 내내 편집기앞에 앉아있었지만 돌아가는 소리에 여간 민감하지 않아 촬영소와 그 가족들속에서 벌어진 이런 저런 소식들과 풍문들이 모두 편집실에 흘러들었으며 총장과 부총장들, 연출가와 촬영가, 배우들에 대한 인물평도 종종 입에 올랐다. 그들은 연출가 최승진에 대하여서는 남다른 존경과 동정심을 가지고 이따금 이야기했는데 연출가들가운데서 녀성을 제일 존중하는것이 그라는것이였다. 특히 영화화면에는 한번 얼굴도 내밀어보지 못하고 뒤에서 묵묵히 영화제작에 헌신하는 《뒤스타프》의 녀성들에 대해서는 극진히 보살펴준다는것이였다. 방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손수 문을 열어 자기네를 먼저 들여보내고 따라들어간다느니 층계나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것을 띄여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들어다준다느니… 이러루한 소행에 대한 이야기들이였다. 그리고 영화창조사업에 그처럼 진지하고 심각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는 예술가는 드물것이라는것이였다. 그는 새 영화제작에 접하면 리발과 목욕을 새로 하고 배우작업을 하게 되거나 편집원과 나란히 앉아 영화편집을 하게 되면 의례히 옷에 향수를 연하게 치고 나온다고 하였다. 안해가 사망한 다음에도 그 습성에 구김살이 가지 않아 덞었거나 구겨진 옷을 입고 배우들앞에 나타난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부인이 사망하다니! 윤희는 웬일인지 가슴에 아픔을 느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연출가 최승진의 예술적개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흔히 로영무라는 연출가와 비교하여 이야기하군하였다.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로영무가 버들방천곁을 유유히 감도는 시내물의 서정적인 흐름이라면 최승진은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폭포였다. 로영무가 고요하고 깊은 호수라면 최승진은 격랑을 일으키는 바다였다. 로영무가 후끈한 화기를 은근히 풍겨주는 화독이라면 최승진은 불찌를 날리며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로영무가 따스한 보슬비라면 최승진은 시원한 소나기였다. 

편집실의 녀성들은 예술적개성이 판판 다른 그 두사람이 거의 30년간 한번 금이 간일도 없이 우정을 유지해오고있는데 그것이 사실일가 아니면 영화계에서의 자기들의 위치와 체면때문에 감정을 깊이 묻어두고 사는것일가 하고 궁금해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하여 최승진의 인간미와 인격을 알게된 윤희는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여 복도나 촬영소구내길에서 어찌다 마주치게 되면 머리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 옆으로 피해서 지나치군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윤희가 최승진이와 어기고 몇걸음인가 걸어가다가 얼결에 뒤돌아보니 그가 쓸쓸하고 괴로운 얼굴을 외로 돌리는것이였다. 자기 뒤모습을 몰래 지켜본 눈치였다. 어째 저럴가? 두렵기도 하고 가슴이 활랑거리며 볼이 확 달아올랐다. 그후에도 같은 일이 몇번인가 거듭되였다. 어느날 최승진이 편집실에 들어와 편집실장아주머니와 나란히 앉아 신진연출가가 촬영현지에서 찍어보낸 필림을 편집해주다가 급한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다. 편집실장아주머니가 편집대우에 널려진 필림을 정리하고 걸상에 걸려있는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겨 옷걸개에 걸려다가 두번째 단추가 다 떨어지게 된것을 보고 윤희더러 바느실이 있으면 달아주라고 이르고는 어디로인가 나가버렸다. 

편집실에는 윤희 혼자뿐이였다. 그는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으나 양복저고리를 들어안았다. 그가 단추를 다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달고 입으로 실을 막 물어끊는데 최승진이 들어왔다. 윤희는 대뜸 얼굴이 발개져 그에게 양복저고리를 황황히 내밀며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단추가 떨어져서…》 

최승진은 빼앗듯이 양복저고리를 나꾸채서 어깨에 활 걸치더니 노한 얼굴로 그를 보며 나무리였다. 

《시키지도 않는 일을… 다시는 이러지 마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윤희는 놀라서 크게 뜬눈으로 그가 사라진 문쪽만 지켜보며 파랗게 질린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러는가. 《뒤스타프》의 녀성들을 그토록 존중한다던 사람이 나한테만은 왜 저렇게 무례하고 몰인정하고 가혹한가,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일이 있은후 최승진은 윤희만 보게 되면 외면하거나 먼발치에서부터 피하여가는것이였다. 그때마다 윤희는 가슴에 고드름이 달리고 그 어떤 반발심이 쇠꼬챙이처럼 솟구쳐올라 견딜수 없었다. 그는 단 둘이 조용히 만날 기회만 생기면 내놓고 따져보리라 별러왔다. 이제는 연출가 최승진의 명성이나 나이따위는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잡하고 분망한 생활의 흐름속에서 그런 기회는 좀처럼 마련되지 않았고 그대신 넉달후 최승진이 출장간 다음 그의 집에서 생긴 뜻밖의 화재로 하여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고말았다. 그날 윤희는 시내의 백화점에 갔다오다가 영화예술인 아빠트의 어느집 창문에서 시꺼먼 연기가 꾸역꾸역 피여나오는것을 보고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불이다- 화재요-》 하고 새되게 부르짖는 소리가 가슴을 선뜩 에이였다. 윤희는 모든것을 잊고 현관쪽으로 달려가 물바께쯔며 소랭이들을 들고 모여든 아낙네들과 한데 어울려 불이 난집으로 뛰여들어갔다. 

화재는 세대주가 쓰는 방에서 일었는데 때마침 달려온 아낙네들이 휘뿌리는 물벼락에 인차 꺼지고말았다. 동네아낙네들이 숨이 턱에 닿아 헐썩거리면서 구석쪽에 서있는 이쁘장하면서도 당돌하게 생긴 처녀애에게 욕설도 퍼붓고 혀를 차며 여러가지 동정의 말도 하였다. 처녀애는 올롱해진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변명도 하고 맹꽁이같은 대답질도 하였다. 윤희는 그 오가는 소리들속에서 이것이 연출가 최승진의 집이며 처녀애가 그의 딸이란것을 알았다. 화재는 처녀애가 아버지의 옷을 다린 다음 다리미의 전기를 끄는것을 잊고 그냥 쪽잠이 들었기때문에 생긴것이였다. 동네아낙네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도 윤희는 웬일로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처녀애를 도와 방을 치웠다. 걸레로 방바닥의 물을 훔치던 처녀애가 책상밑에 떨어진 자그마한 사진액틀을 들어 팔소매로 몇번인가 닦더니 그것을 탁상등밑에 세워놓으면서 아버지가 적적하면 들여다보는건데 이것만 못쓰게 만들었다면 집에서 쫓겨날번했다고 혼자소리로 종알거렸다.  

윤희가 사진쪽에 눈길을 돌리자 책상우를 닦던 처녀애는 그에게 경계의 눈길을 흘깃 던지였다. 

《보지 말아요. 이건 아버지 비밀이야요.》 

《응?… 비밀?》 

윤희의 놀라움과 호기심에 처녀애는 좀 우쭐해졌는지 어른들한테는 한두가지 비밀이 있는건데 자기는 아버지의 비밀을 다 안다고 자랑했다. 

《글쎄 들어봐요. 한번은 아버지 오랜 친구인 작가선생님이 와서 아버지하고 밤깊도록 술을 마시며 하는 얘기를 엿들었는데 이 녀자가 우리 아버지 첫 애인하고 거의 같이 생겼다나요. 첫사랑은 깨지기 쉽고 그대신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니까요…》 

그 처녀애는 제법 인생 신비와 고뇌를 죄다 꿰들고있기라도 한듯 이마에 보일듯말듯 주름살까지 지으며 한숨을 호- 내쉬였다.  

윤희는 처녀애의 머리우로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만 아연해져 비명을 지를번했다. 그것은 람루한 옷차림의 두 소년을 량옆에 꼭 껴안고 뒤골목의 울담밑에 기대여 쪽잠이 든 녀교원의 사진이였다. 비참상이 강조되도록 분장을 진하게 했던탓인지 처녀애는 사진속의 녀교원이 자기앞에 서있다는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것 같았다. 

정신없이 합숙으로 달려온 윤희는 며칠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가슴을 부여안고 소리없이 울기도 하였다. 여기를 떠나 어딘가 멀리로 도망쳐가 숨어버리고도싶고 미지의 그 첫 애인을 대신하여 그에게 위안과 기쁨도 주고 힘도 보태주고싶었다. 

모순되는 감정과 번민의 모대김속에 두석달이 지나갔다. 최승진은 날이 갈수록 그를 점점 더 멀리하려고 애썼으나 윤희의 다감한 감정은 그 인위적인 거리감에서 자기를 귀중히 여겨주며 아껴주려는 불같은 마음을 낱낱이 느낄수 있었다. 그 인간됨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괴로운 마음을 더는 참을수 없게 되였다. 

윤희는 옛 교장을 찾아가 상대의 이름만은 밝히지 않고 그사이 있은 모든 사연을 다 털어놓고 자기 심정까지 고백하였다.  

교장은 담배를 연거퍼 피우며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천정의 한점을 지켜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이건 신중한 운명문제요!… 론리로는 설명할수 없는 문제지…》 

그리고는 그 상대가 누구인가고 따져물었다. 

윤희의 대답을 듣자 교장은 소스라쳐 놀라며 그를 돋보는 눈길로 이윽토록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최승진이!… 공훈예술가… 그야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예술가가 아니요. 나는 그가 만든 영화들을 죄다 보았소. 크고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람만이, 아름답고 고상한 정신을 소유한 예술가만이 그런 작품을 창조할수 있소. 나는 그의 인간됨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소. 그리고 애정에 그쯤한 년령차이가 무슨 대수겠소. 예술가에겐 영원한 청춘이 필요한것이고 두 운명의 결합이 영화창조에 리로울것도 자명한 리치요. 그리고 또… 진실로 애정에 기초한 결합이라면 개명한 현대인들중에는 비난하거나 시비할 사람도 별로 없을것이요. 그러나 … 그러나 일생의 문제인것 만큼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오. 오빠하고도 의논하고 부모님들의 의사도 거역해서는 안되오.》

교장은 결국 대답을 회피하는것이였다. 

사촌오빠는 그의 이야기를 듣자 펄쩍 놀라며 애초에 너를 촬영소에 보낸것이 잘못이였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촌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이 일을 알면 당장 달려와 머리끄뎅이를 잡아 집으로 끌어갈것이라고 했다. 

그는 얼굴빛이 대뜸 사나와져 씨근거리며 최승진에게 입에 담지 못할 험악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하였다. 

《흉측한놈,남의 집 딸을 어떻게 꾀였으면 이지경이 됐는가.우리를 얕보고 수작질을 했겠지. 어디 보자! 예로부터 영화인들의 생활이 복잡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럴줄은 몰랐다.내 다시는 영화를 안보겠다.》 

윤희는 얼굴빛이 해쓱하게 질려 항변하였다. 

《오빠.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정말이예요.아니예요!》 

《듣기 싫다!》 

교장의 회피와 오빠의 험구는 역작용을 놀아 그의 가슴속에서 최승진에 대한 감정을 활활 타번지게 하였다.윤희는 부모와 친척들의 반대로 결혼은 못해도 그를 존경하는 예술가로서 지성껏 도우리라 속다짐하였다.그리고 이렇게 결심한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볼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 공교롭게도 최승진이 시름시름 앓다가 구역병원에 입원하였다. 위궤양이라고 하였다.

윤희는 매주 일요일마다 병원으로 찾아가 병문안하였는데 하루는 신선한 과일을 사들고 들어가다가 병원 정문에서 사촌오빠와 마주치게 되였다. 성미 드센 그가 최승진에게 무슨 행패질이라도 하고 나오는 길이 아닌가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오빠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담장밑으로 윤희를 끌고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승진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라면서 《사람은 점잖더구나…》 하고 말하였다. 

윤희는 그 한마디에 설음이 터져올라 오빠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으며 눈물을 한껏 쏟았다. 

오빠는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는 주먹으로 공기를 내리쳤다. 

《에익, 나두 모르겠다!》 

그는 그날로 교장선생을 찾아가 밤새껏 의논하였으며 며칠뒤에는 둘이서 교외농촌의 부모님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무슨 감언리설로 풍습에 완고한 늙은이들을 설복시켰는지 반승낙을 받아가지고 왔으며 최승진이까지 만났다. 최승진이 부모님들을 찾아가 옛 풍습대로 방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할 때 윤희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길 없어 외로 돌아서 흑흑 느껴울었다. 

윤희는 남다른 결혼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최승진이를 점점 더 깊이 리해하게 되였으며 이전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많은것을 새롭게 느끼게 되였다. 우선 그는 결혼전에 자신이 은근히 두려워했고 부모들과 처녀동무들이 말없는 가운데 우려했던 나이차이를 생활에서 왕왕 잊어먹게 되거나 전혀 느낄수 없었던것이다. 

신기한 일같았지만 따져보면 그 까닭이 명백했다. 남편이 된 최승진, 그 사람에게는 20대 청춘시절의 열정과 기백이 그대로 살아 약동하고있었으며 지어는 10대전의 동심까지 넋속에 살아남아 숨쉬고있었다. 그래서 윤희는 남편을 통하여 명성높은 예술가, 중년의 사려깊은 남성만을 느낀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열정이 굼틀거리는 청춘시절의 그, 순박하고 천진란만한 철부지시절의 그까지 느끼였으니 부부생활은 권태와 무미건조함을 몰랐고 때때로 허리부러지는듯한 웃음을 터쳐 이웃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도 되였다.

최승진은 젊은 안해의 과거생활뿐아니라 남들의 과거와 현재생활에 대하여서도 저속한 호기심을 내비치는 때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윤희도 남편의 지난 생활을 캐고들려 하지 않았으며 자기와 모색이 비슷하다는 그의 첫 애인에 대하여서도 이따금 호기심이 동했으나 묻지 않았다. 먼 동해의 농촌에 사는 최승진의 친척들은 대체로 그에 대해 노여움이나 원망을 품고있었다. 그가 친척들의 대사에 한번 얼굴을 내민적이 없고 그만한 지체에 있으면서 동생벌되는 아이들에게조차 전혀 관심을 돌려주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런 노여움이 담긴 편지가 날아들면 남편은 얼굴이 어둑해져서 자책감에 잠기다가도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고향에서는 나를 무슨 대통령이나 대신쯤으로 여기는것 같소. 영화자막에 이름 석자가 크게 나니까… 우리 한번 어떻게나 휴가를 내여 고향에 가보자구.》 

그때마다 윤희는 얼굴빛이 심각해져서 자기가 채심해서 고향친척들에게 편지라도 자주 써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영화인들의 부정한 생활에 대하여 항간에 돌아간 이런저런 풍설과는 달리 최승진에게는 막역하게 친근한 녀자동무란 한명도 없었다. 집으로 찾아오거나 그와 생활적인 뉴대를 가지고있는 친구들이란 모두 촬영가나 배우, 작가나 미술가들뿐이였다. 직업상의 동료들, 사업상의 동지들뿐이였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영화나 자매예술에 대한 이야기와 떠들썩한 론쟁들을 벌리였고 그러다가도 새 인공위성의 발사와 같은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면 미래의 인간생활, 미래의 영화에 대하여 공상하면서 21세기나 22세기에 가서 영화보다 더 앞선 새 예술형식이 나타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발생발전한 20세기에 소설이나 회화예술이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것처럼 먼 미래에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영화예술의 생명력은 영원할것이라고들 하였다. 

남편 최승진은 서둘러서 사는 사람같았다. 그는 한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두개, 세개의 영화창작을 공상하였으며 조국의 모든 부문에서 벌어지는 사변들을 영화화하고싶어했다. 로동자들의 생활, 농민들의 생활, 인테리들이 생활… 조국애, 영웅주의, 동지애, 륜리도덕 문제에 대하여서도 탐구해나갔다. 작가들은 자기 체질에 맞는 제재만을 골라잡아 영화를 만드는 로영무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미식가라고 하였으며 제재에 관계없이 모든것을 영화로 만들어보고싶어하는 불면불휴의 정열가 최승진에 대하여는 식성이 좋은 대식가라고 롱조로 말하였다. 

이러한 사람과의 결혼이 윤희에게 차례진 행복의 기초였다. 그는 이 기초우에 행복의 탑을 높이 쌓아올려 한껏 행복해지고싶었다. 처녀시절의 공상대로 뛰여나게 행복한 녀성이 되고싶었다.

 

 

 

 

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3

 

 

부나비들처럼 날아돌며 내리는 눈송이들이 외등들의 밝은 불빛에 유난히 반짝이는데 그 눈을 맞으며 촬영소정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은 여느날의 퇴근시간과는 달리 하나같이 열기와 흥분에 떠서 떠들며 웃고 찬탄의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활기에 넘쳐있었다. 그들은 쌍쌍이 짝을 지어 혹은 여럿이 떼를 지어 나오며 입김을 훌훌 날리면서 서로 가로채며 떠들어대는가 하면 명상적인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상쾌하게 내리는 눈을 즐기기도 했다. 

언제나와도 같이 정문앞의 큰길가에는 지나가던 행인 여럿이 몰켜서서 황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어느 영화에서 낯을 익힌 배우를 찾아보았는지 시무룩 웃기도 하고 자기들에게 기쁨과 교훈을 주고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주는 그들을 존경과 선망의 눈빛으로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행인들은 영화예술의 창조자들인 저들도 알곡이나 남새를 생산하거나 기계나 양말, 우산같은것을 만들어내는 자기네와 다름없이 한평생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해야 되는 정신문화의 근로자들이고 영화제작의 그 세계가 아무리 희한한데라고 해도 사회의 한부분인 이상 일반사회의 갖가지 생활정서와 감정, 욕구, 긍정과 부정, 량심과 비량심의 대결과 투쟁, 세태생활의 온갖 행복과 고뇌가 비껴들지 않을수 없으리라는데 대하여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정문에서 계속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은 방금전에 끝난 광폭예술영화 《광풍》시사회에서 받은 충격때문에 흥분과 감격에 떠서 끝없이 심정들을 토로하는것이였다. 

《정말 감동됐어!》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다음에도 나는 일어나지 못했어. 확실히 대작이요.》 

《이보라구, 이제는 우리 영화도 소리치게 됐네.》 

《언니, 불이 켜지고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쳐줄 때 최승진연출가 얼굴을 여겨봤어요? 여기저기에 머리를 숙여 답례하는 그 겸손한 모습, 수집은 미소, 아이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인지…》 

시간이 퍼그나 지나 사람들이 다 퇴근해나온 다음 고요가 깃든 정문으로 두사람의 그림자가 가지런히 걸어나왔다. 한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언제인가 페결핵이라도 앓은듯 가슴이 꺼져들어가보이고 과묵하며 진중한 인상이고 다른 사람은 보기 좋은 중키에 름름하게 잘 생기고 중절모까지 써 인품이 준수하고 어지간히 세련된 모습이였다. 로영무와 최승진이였다. 

그들은 외투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묵묵히 걸어나왔다. 정문을 벗어나자 최승진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허, 눈이 좀 오겠는걸.》 

《오겠소…》 

《이런 밤엔 한대포하고 끝없이 걸었으면 좋겠구만. 로형, 어디 조용한 식당같은데 가지 않겠소?》 

《…》 

로영무는 무슨 생각에 골똘했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모자가 없는 그의 머리에 눈송이들이 하얗게 앉았다.

《가자구, 아무데나… 눈까지 오겠다, 얼마나 정서적인 밤이요.》 

《…》 

《어디 속이라도 말째오?》 

《아니… 아니요.》 

이때 정문안쪽에서 웬 처녀가 로영무를 찾으며 바람같이 달려나왔다. 분장미술가 장미혜였다. 

처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로영무를 쳐다보며 웬 털모자를 내밀었다. 

《이게 연출가동지 모자가 아니예요?》 

《음?》 

《시사실에 연출가동지 앉았던 의자밑에 떨어진걸 영사원아바이가… 몹시 흥분했던게지요? 아바이 말이 연출가동지가 시사회에 참가했다가 모자까지 잊고나간 일은 첫일이라나요. 호호호…》  

처녀는 명절기분이 되여 두 연출가를 향해 밝게 웃다가 로영무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인차 얼굴색이 달라졌다. 

로영무는 처녀가 어떻게 물러났는지 몰랐다. 그는 이 털모자를 통하여 남한테 내비쳐서는 안될 마음속의 부정한 비밀이 들켜나기라도 한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서 그 털모자를 머리우에 올려놓지 못하고 손에 쥔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슨 정신에 모자까지 잊고 나왔던가? 가슴이 저려나고 몹시 당황해졌던것만은 사실이였다. 시사실에서 터져오른 박수소리가 지금도 폭풍처럼 휩쓸어들며 자기 존재를 지푸래기처럼 아득한 공간으로 날려보내는것 같았다. 그는 영화가 그토록 찬사를 받을만큼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연출가의 나래치는 환상이 그려놓은 현란하기도 하고 서정적이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화폭들속에 비진실, 허위, 과장된 그 무엇이 숨어있는듯 했다. 화면들이 바람처럼 눈앞을 휙휙 날아지나갈 때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일어나는 무언의 흥분과 감탄의 회오리속에서 그의 리성은 취해버린 감각을 흔들어깨우며 아니다! 아니다! 하고 몇번인가 속삭여주었었다.

불이 켜지고 모두 일어나 최승진에게 박수갈채를 보낼 때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식은땀에 젖어 그냥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로 쏠리는 몇사람의 눈길을 느끼고 황황히 일어나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박수를 기계적으로 쳤다. 

(왜 그랬던가? 모두가 좋다는데 나는 왜 이런가? 나는 왜 모든 사람들처럼 흥분하고 감탄하지 못하는가. 예술을 하면서 한평생 경계해온 그것이 이리처럼 날카로운 이발로 내 량심을 물어뜯어 태를 쳐놓았단말인가? 최승진은 내가 아니다. 그의 사랑이 내 사랑이 아니고 그의 죽음이 내 죽음이 아닌것처럼 그의 성공이 내 성공일수는 없다. 이런 악명높은 론리에 량심과 리성이 썩어문드러졌단말인가? 아, 예술가를 비렬한으로, 추물로 만드는 악마중의 악마여…) 

눈을 맞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던 로영무는 최승진이 자기를 여겨보는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최승진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작품이 맘에 안드오? 그러면 그렇다고 터놓고 말해주오!》 

로영무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요. 좋소. 대단히 좋소. 이제 사회에 나가 돌아가면 인민들속에서 큰 반향이 일어날게요.》 

《그럴가?》 

《…》 

《그렇다면 오늘저녁 기분이 왜 그렇소? 내가 풋내기들처럼 박수갈채에 떠서 경박하게 논게 아니요?》 

《아니 여보, 무슨 그런 소릴 다 하오.》 

그러자 최승진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자기 성공을 함께 기뻐해주지 않을뿐아니라 오늘 저녁의 자기 기분마저도 외면한다고 섭섭하게 여기는것 같았다.

그들은 영화예술인아빠트앞에서 여느때와 다름없이 인사말을 나누고 헤여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로 서먹한 감을 느꼈다. 한평생의 우정에 눈에 띄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한듯 하였다. 

벗이 자기네 현관으로 사라진뒤에도 로영무는 마음이 무거워 흩날리는 눈발속에 그냥 서서 불빛이 밝은 그의 집 창문을 쳐다보았다. 

문득 새로운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니다. 내가 그의 성공을 기뻐하지 못하는것은 그 어떤 추악한 감정때문이 아니다. 내 감각때문이다. 로둔해진 감각때문에 남들처럼 느끼지 못했던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더러운 혐의의 멍에에서 벗어난듯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으나 인차 다른 괴로움, 로쇠에 대한 자각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로영무는 허연 입김을 내불며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만약 나한테서 연출가로서 가져야 할 감각이 다 무뎌졌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손가락질을 당하기전에 물러나자. 젊은 동무들한테 자리를 내주고 다른 직무에 옮겨앉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가… 예술이라는 세계엔 종신대통령제 비슷한 따위는 없으니까…) 

로영무의 안해 성녀는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어깨가 축 처져들어온 남편의 가방을 받아서 복도에 얼른 내려놓고는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며 가슴팍, 잔등을 걸싸게 툭툭 쳐서 눈을 말끔히 털어주었다. 

성녀는 남편의 상심한 얼굴을 흘깃흘깃 훔쳐보면서도 안팎이 다 영화바람에 춤을 추어서는 안된다는 제나름의 생활계률을 지켜 아무말도 묻지 않았을뿐아니라 완전히 둔감하고 무지한 아낙네처럼 태평스러운 얼굴이였다. 그러한 무관심에 습관된 로영무는 아무말없이 방에 들어가 안해가 들여온 밥상에 마주앉았다. 

성녀는 밥상곁에 까치다리를 하고 웅크리고앉아 남편이 수저를 놀리는것을 지켜보다가 김치보시기를 가리키며 새독에서 꺼내온것인데 맛이 어떤가 좀 보라고 하였다.

로영무는 그 말에 응할대신 눈길을 들어 안해의 머리를 여겨보았다. 거기에는 인생의 서리가 애처로운듯 조심스럽게 내려앉아 희끗희끗한 오리들이 반짝이고있었다. 

《내 머리에 뭐가 묻었수?》 

성녀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로영무는 서글픔이 스민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도 이제는 늙어가오. 천상 늙지 않을것 같더니.》 

《원 새삼스럽게…》 

《헝, 칠흑같던 머리칼이였댔는데…》 

《이젠 흰오리들이 많아졌지요?》 

그 한오리한오리가 어째 세였는지 잘아는 로영무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여보였다.  

《어떤이들은 보기 싫다고 염색이랑 하지만 나는 그러고싶지 않아요. 사람이 늙어가고 영생하지 못하는거야 어쩔수 없는 숙명이라는데 물감칠을 해서 나이를 감추어서는 뭘하우. 나는 오히려 오리오리 센 머리를 사람들한테 뻐젓이 자랑하며 다니고싶어요. 나는 한 예술가를 세상에 내세우느라고 한평생 궂은일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옛날엔 눈물을 랭수마시듯하면서 살아왔다 하고 말이예요. 우리 오랜 예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햇병아리들이 우리 주름살과 백발을 무심히 보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로영무는 허구프게 웃었다. 

《허허… 당신은 언제봐야 락천가에 시인이라니까, 처녀때 이 거지류랑배우한테 오지 않고 시를 썼더라면 괜찮은 시인이 됐을거요.》 

《그렇게 웃지 말아요. 내말이 어디 그른데가 있어요? 여보, 우리 겉은 늙어도 속은 시퍼래있자요. 당신은 더욱 그래요. 아까 들어오는걸 보니 맥이 다 빠진 령감같더라니까요. 가슴이 철렁했더랬어요. 당신은 연출가가 아닌가요? 좀 겉멋도 부리고 사치한 생각이랑 하라요. 내가 예전처럼 함부로 트집이랑 걸지 않을테니까. 아까 저녁녘에 승진선생댁에 가봤는데 부엌이랑 복도랑 방이랑 모두 새롭게 꾸려놓았는데 어찌나 정신이 드는지… 오늘 시사회가 있다고 술, 맥주까지 사다 찬장에 넣어두고 기다리지 않겠어요. 덜된 훈시는 잔뜩 하고 왔지만 우리 옛적 생각이 나면서 부러운 생각도 없지 않더라니깐요.》 

《부럽더란 말이요? 욕심두… 우리 인생우에는 벌써 황혼이 비낀것 같소. 아름다운 황혼인지 어둑한겐지 모르겠지만… 한 예술가에겐 한시대만 차례진다는 말이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제야 그뜻을 알게 된것 같소. 나에게 차례진 시대는 해방직후부터 전후복구건설시기까지인것 같소. 천리마시대가 시작되면서 나는 벌써 낡아지기 시작했소. 예술가로서의 내 생명은 분명히 끝나가오. 그래서 기회를 봐서 자리를 내놓고 다른데 물러앉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소.》 

안해는 눈이 휘둥그래져 남편을 쳐다보았다.

《여보, 당신 오늘저녁 어떻게 된 일이예요? 왜 맥빠진 소리만 해요. 예술을 그만두면 당신이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수 있나요? 못하나 제대로 박을줄 모르는 당신이…》 

《그런 걱정은 마우. 예전에 술주정뱅이 늙은 배우 한사람이 인생말년에야 자기 무능을 깨닫고 친구한테 직업을 바꿀 생각인데 배운 재간이 없다구 하소연했다우. 그때 그 친구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가 하니 사람으로 나서 일거리를 찾지 못한다는건 말이 안된다, 정 재간이 없으면 우체통옆에 혀를 내밀고 앉아있게나, 그럼 편지부치는 이들이 자네 혀바닥에 우표를 적셔 봉투에 붙일수 있지 않나. …이랬다우. 허허허…》 

로영무는 눈물이 그렁하여 껄껄 웃고 안해는 침통한 얼굴로 남편을 지켜만 보았다. 

이때 출입문쪽에서 손기척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도발적인데가 있는 울림소리였다. 

《강고민이예요…》 하고 안해가 속삭이고는 움쭉 일어나 달려가더니 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이런 날에 외투도 없이…》 

복도에서 헐썩거리는 숨소리가 다가오더니 안해의 뒤를 따라 강철룡이 방에 들어섰다. 머리에 눈을 하얗게 들쓴 그는 속이 뒤틀린듯한 기색이였는데 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로영무를 보며 헤식은 미소를 머금었다. 

《요기를 해야 되겠습니까? 승진연출가네 집에 다 모였는데…》 

로영무는 얼떠름해져 부연출을 쳐다보았고 성녀가 대꾸했다. 

《그래요?》 

《예- 그 집은 경사지요. 작품이 절찬을 받았으니까 연출실에서 다 오구 촬영가, 배우들도 여러명 찾아왔습니다.》 

《여보, 왜 그냥 앉아있어요. 누구보다도 제일먼저 달려가야 할 당신이… 그 집에서 이상하게 여기겠어요.》 

로영무는 안해의 재촉에 역증까지는 아니지만 어지간히 불쾌한 얼굴로 뇌까렸다. 

《됐소, 무슨 큰변이 났다고 야단이요? 가면 될거 아닌가.》 

성녀는 젊은 부연출에게 끌려가다싶이 출입문밖으로 나서는 남편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문을 조용히 닫고 한숨을 내쉬였다. 

남편이 측은하게 여겨져서였다.

 

x

 

밖에서는 여전히 눈송이들이 날리고있었다. 불빛이 환한 최승진이네 집 창문들에서는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에서 결패스럽게 걸어가던 강철룡이 갑자기 뚝 멎어섰다. 

《연출가동지, 좀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왜 그랬습니까?》 

《무얼?》 

《저 작품이야 처음에 연출가동지가 맡은게 아닙니까. 해보지도 않고 왜 내놓았습니까? 그냥 했더라면… 에익, 분해요.》

그것은 사실이였다. 그때 로영무는 영화문학을 연구하고 연출대본을 쓰다가 몇가지 아리숭한 문제점에 봉착하였다. 그는 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 문제점들이란 정치적으로 이렇게 저렇게도 해석될수 있는것이거나 새롭고 대담한 형상적시도인듯도 하였다. 영화문학작가에게 불안감을 고백하고 고치도록 설복해볼것인가. 그가 설복에 응하지 않으면 크게 론쟁을 벌릴것인가… 영화의 방대한 규모와 영화제작에 투입될 막대한 자금과 자재, 인원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며칠 망설이며 번민하다가 자기 예술적개성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미명하에 작품을 내놓겠다고 예술위원회에 제기하였다. 그때 그의 희한한 제기는 예술위원들에게 수긍되였을뿐아니라 탐욕을 모르는 순결하고 량심적인 예술가의 선행으로 인정되였으며 작품은 며칠후 최승진에게로 넘어갔다. 최승진이 작품을 완성하여 절찬을 받고있는 지금 그 일을 상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의 방조자인 이 젊은 부연출만은 자기 성과를 남한테 빼앗긴것 같아 분해하는것이였다. 

눈은 하염없이 흩날리고 불만의 소리는 계속되였다. 

《가슴에 피가 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출가동지를 나무랄겁니다.》 

《나무란다?… 그러라지. 허허허…》 

《연출가동진 위선자입니까 뭡니까, 웃음이 나와요?》 

《그 심정이 리해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너무 지나쳐. 남이 성공했을 때 그런 감정을 품으면 못쓰네. 자극을 받아 분발하는건 좋지만 그러면 안되지, 그건 리기적인… 속물근성이야.》 

《그러니까… 제가… 질투한다고 생각합니까? 오늘밤엔 제발 저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제가 분해하는건 바로 연출가동지 소심성때문입니다. 언젠가 연출가동지는 한 작가의 말을 빌어 아주 좋은 말을 해줬습니다.… 예술적착상이란 번개와도 같은것인데 번개는 주저와 소심성을 모른다고… 그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심해졌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실패… 사회적비난… 그게 두렵다면야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지요. 그리고…》 

로영무는 노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젊은이를 쏘아보았다. 

《왜 말을 끊어? 속을 더… 더… 털어놓으라구.》 

강철룡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였다. 

《좋습니다. 그 소심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저는 연출가동지밑에서 부연출을 못하겠습니다.》 

로영무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 대단하군, 대단해… 이 친구야, 성공이 그렇게 조급해나나?》 

로영무는 이 청년을 여간 사랑하지 않았다. 

강철룡은 제대군인출신으로서 아직 미혼이였으며 연극영화대학 통신학부 졸업반이였는데 향학열이 높고 정의감이 강한 청년이였다. 그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남몰래 경쟁대상자로 삼고 그들의 재능과 지성을 따라잡거나 앞설 목표를 세우고 자신에게 비상한 요구성을 제기하며 학습하고 탐구하였다. 그는 로임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바쳐 신간도서들을 사들여 탐독하였는데 그 독서범위는 대단히 넓어 문학예술뿐아니라 력사, 지리, 정치경제학, 철학, 심리학, 생물학, 법학까지를 포괄하고있었다. 독서에 체계성이 약한것이 결함이지만 기억력과 리해력이 뛰여나 읽은 책들속에서 중요한 내용들은 거의다 머리속에 넣고있었다. 그는 남들이 습관과 타성에 의하여 범상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여 공연한 론쟁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눈에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책에서 본 잡다한 격언들과 명언들이 가득차있어 일상생활과 예술론쟁들에서 그것들을 함부로 내휘두르는 인용벽때문에 동료들속에서 조롱을 당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롱쯤에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는 사색형의 인간이면서도 양순하지 않고 대바르며 드센데도 있는 청년이였다. 연출가들은 자기가 작성한 연출대본에 의견을 제일 많이 내고 쩍하면 왕청같은 수정안을 들고나와 공연한 론쟁을 불러일으켜 제작단을 소란하게 만드는 그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별명이 붙어다녔다. 강철학, 강고민, 강개탄…

 

 

 

 

 

 

 

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4

 

 

로영무는 강철룡을 데리고 아빠트둘레를 한바퀴 걸어 돈 다음에야 최승진의 집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선 그들은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술냄새와 담배연기, 후끈한 화기에 휩싸여버렸다. 서재쪽에서 즐거운 말소리들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반에 빈 접시들을 담아들고 나오던 윤희가 깜짝 놀라며 손에 든것을 얼른 복도에 내려놓고 달려나와 반겨웃으며 인사하였다. 남편의 성공에서 오는 행복감과 누가 억지다짐으로 권하는 술 몇잔을 받아마신때문인지 그 녀자의 얼굴에는 홍조가 타올랐다. 

《오셨구만요. 정말 고마와요. 어서… 어서 들어가세요. 아이 모두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주부의 말소리를 듣고 부연출 한기석이 달려나왔다. 취흥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로영무의 팔을 끼고 서재쪽으로 이끌며 섭섭한 소리를 했다. 

《아니 어째 이렇게 늦어졌습니까, 제일먼저 달려와야 할 연출가동지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빈자리가 비여있으니 영 분위기가 생기지 않았는데…》 

서재에는 두리반상 두개가 가지런히 놓였는데 상마다 술병과 맥주병, 안주접시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흥취를 돋구었다. 상둘레에 둘러앉은 연출가들과 촬영가들, 몇명의 배우들은 로영무가 방에 들어서자 모두 반색을 하며 한마디씩 떠들썩하게 인사말을 하였다.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가극단 작곡가 고일명이만이 로영무와 사돈간이여서 체면을 차리는지 그저 빙긋이 웃어보이며 눈인사를 보낼뿐이였다. 두사람은 오래전부터 가까운 친구지간이였는데 자기 딸을 고일명이 아들한테 준 다음부터 로영무는 웬일인지 그를 좀 멀리하게 되였다. 

그래서 그의 눈인사에 머리만 끄덕여보이는데 상좌에 앉아있는 최승진이 일어나기까지 하며 로영무를 자기곁으로 불렀다. 그때 한기석이 무슨 기염을 토하든가 객기라도 부리고싶은지 최승진을 눌러앉히고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좀 조용들 하시오. 자, 자, 정숙-》 

최승진의 밑에서 내내 부연출을 담당해오는 그는 이 집에서 망년회가 열린다든지 무슨 대사가 생기면 스스로 집행자, 사회자의 역을 맡아나서군했었는데 오늘저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안주상에서 큼직한 사과한알을 쥐여올려 흑흑 불어보더니 그것을 로영무의 입앞으로 쑥 내밀며 제법 세련된 방송기자의 말투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방송 기자입니다.》 

영문을 몰라 눈을 내리뜨고 코밑에 들어온 사과만 지켜보던 로영무가 모든것을 즉시 깨닫고 웃어보이며 그의 너스레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흐,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이 눈오는 날에 먼길을 걸어오신것 같은데 아바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저요? 예- 저는 황철 용광로 로장이올시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슨 볼일로…》 

《예… 다름아니라 여러분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철로동계급들을 대표해서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한기석은 사과를 자기 입앞으로 가져온다음 좌중을 향하여 환희에 넘쳐 소리쳤다. 

《여러분, 영화예술인동지들, 여러분을 축하하기 위하여 황철에서 불원천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황철로동계급의 대표를 열렬히 환영합시다!》

손님들은 한때 재치있는 배우였던 로영무의 림기웅변의 연기술에 감탄하면서 모두 좋아라 웃어대며 박수를 쳤다. 그중에서도 기뻐하는것이 최승진이였다. 그는 박수를 치다가 로영무에게 곁으로 오라고 손짓하였다. 로영무가 그의 곁에 자리를 잡자 한기석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강철룡의 입앞에 사과를 내밀었다. 

《동무도 어딘가 먼곳에서 오신것 같은데요? 2.8비날론에서 왔는가요? 성진제강에서 왔는가요?》 

강철룡이 그 사과를 움켜쥐려고 했다. 한기석은 사과를 자기입앞으로 도로 가져가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마이크를 자기 손에 쥐고 말하자는걸 보니 이 동무는 할 이야기가 많은것 같습니다. 그 소원을 존중하여 마이크를 넘겨주겠습니다.》 

강철룡은 그가 넘겨주는 사과를 받아쥐고는 아무 소리 없이 촬영가들속에 끼여앉더니 그것을 맛스럽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여, 여, 이게 무슨 비예술적인 행동인가?》 

그는 애써 웃어보이려고 하며 말투를 롱조로 돌렸다. 

《저 친구 마이크를 저렇게 맛스럽게 먹는걸 보니 쇠붙이를 먹구사는 불가사리구만, 불가사리가 분명해 허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남의 마이크를 씹어먹는건 무슨 심보인가? 여, 강개탄, 정말 개탄할 일인걸.》 

강철룡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볼이 불룩해져 사과를 씹으며 능청스러운 눈으로 상대를 흘금흘금 훔쳐보았는데 그 눈길은 이렇게 말하는듯 했다. 

(불가사리구 심보구 나는 우선 속이 출출해서 먹고부터 봐야겠네.) 

그 익살에 손님들은 박수까지 치며 웃어대고 최승진은 저 친구 저런 괴짜였던가 하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로영무만은 웃지 못하였다. 오늘저녁의 그의 심상치 않은 기분상태를 알고있었기때문이다. 로영무는 젊은이의 익살밑에 선의아닌 그 무슨 심보가 깔려있는것 같고 또 그것을 모두가 느끼기만 하면 흥겨운 자리가 잡쳐지지나 않을가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아 화제를 딴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그는 자기 보기에도 최승진이네 제작단이 이번 작품을 맡아가지고 이전의 어느 작품때보다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것같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모두 그의 말에 긍정하게 되여 화제가 그 방향에로 줄달음쳐나갔다. 

한기석이 신명이 나서 말을 제일 많이 하였다. 그는 이젠 다 옛말로 되였다고 하면서 처음 제작단예산액이 백여만원이상으로 나왔을 때 창조경험이 많고 심장이 큰 연출가동지도 그 엄청난 액수에 속이 질려 아닌게 아니라 얼굴색이 어둑해졌댔는데 그때 함께 운명을 걸고 연출가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짐에 어깨를 들이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고 하며 회심의 모두숨을 내쉬였다. 

고일명이 도드라질사한 이마를 번들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요. 연출가의 예술적신념이 이번 작품을 성공시켰소. 어떤 사람들은 어느 행정간부가 소심성과 로파심으로부터 몇마디 해도 인차 속이 흔들려 그의 견해에 숙어드는데 그런 위인들은 절대 문제작을 낼수 없소. 시내에서 전차를 갈아타는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자기 견해로부터 남의 견해로 옮겨타는 그런 졸장부들은 안돼. 절대 안되오. 예술적신념과 재능… 이건 성공이 비결이요.!》 

《옳습니다!》 

한기석은 환성을 질렀다. 

최승진은 지나간 일들을 더듬는듯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강철룡은 곁에서 권하는 고뿌를 받아 맥주를 욕심스럽게 들이키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안주접시들을 둘러보았다. 

로영무는 저도 모르게 강철룡에게서 한기석에게로, 다시 그에게서 강철룡에게로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두 청년은 겉모습이 풍기는 인상부터가 판판 달랐다. 한기석이 비옥한 땅에서 곧게 자라오른 뽀뿌라나무라면 강철룡은 척박한 산비탈바람받이에서 간신히 자라오른 가둑나무였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의 가정에서 나서 사회의 혜택과 가정의 유족하고 문화적인 환경속에서 구김살없이 자라난 한기석은 우선 겉모습부터가 부모들의 미모를 물려받아 인상좋은 훤한 미남인데다가 괜찮은 문화적소양과 예술적소질까지 겸비하고있어 부연출가들속에서는 단연 뛰여난 존재였다. 

강철룡의 경우에는 그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의 부모들은 두메산골의 농민이였는데 아버지는 일찌기 세상을 떠났었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보살핌속에서 초중까지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 군대에 나갔었는데 그때까지 기차나 살아있는 작가나 예술가를 만나본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전선부대들에서 목소리가 좋은 덕에 예술소조공연에 뽑혔는데 그것이 계기로 되여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활동에 의하여 영화촬영소에까지 오게 되였다. 때문에 그의 소박한 지식과 문화적소양에는 무지의 공간이 많았으며 자신도 그것을 촬영소생활에서 시시각각으로 느꼈다. 그러나 주눅이 들대신 원대한 포부를 안고 공부하고있는 청년이다. 그는 일찌기 군대에서 공병부문의 대좌로 있다가 제대되였으며 현재는 건설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는 형네 집에 얹혀살았다. 

한기석과 강철룡… 두 청년은 여간 다정한 사이가 아니였으나 이따금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 발끈해져서 론쟁을 벌리였으며 그러다가는 크게 웃으며 합의점에 도달하는가 하면 한동안 서먹하게 지내는 때도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 그들의 우정은 더 깊어지는듯했다. 

최승진이 로영무의 팔을 건드리며 맥주를 권하였다. 

《로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오?》 

《아니 그저 좀…저 기석이하구 철룡이를 보라구. 얼마나 개성이 판이한가?》

《하긴 그래… 한 친구는 사과를 마이크로 내밀었는데 다른 친구는 그것을 넙적 받아 먹어치웠거든 허허… 괴짜야. 나는 저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가 늘 고심하는 작중인물의 개성화에 대해 생각한적이 있네. 저런 뚜렷한 대조만이 개성화를 용이하게 하겠구나 하구 말이요.》 

최승진이 가늘게 쪼프린 명상적인 눈으로 아래상에서 떠들어대는 친구들쪽을 여겨보는데 한기석이 무엇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연출가동지, 어째 상좌에선 여기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립니까. 이거 정말 재미가 적습니다.》 

한기석은 벌써 어지간히 취기가 올라 얼굴이며 목까지 벌개졌다. 

《아니 여보, 그렇게 보지 마오. 우리끼리 별로 이야기한건 없소. 저마끔 제 생각에 잠기다나니.》

《여기선 연출가동지 흉을 좀 봤습니다. 흉을… 평소엔 사람이 좋다가도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폭군이 된다구요. 저 바다가장면을 촬영하던때 일이 생각납니까?》 

최승진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무엇인가 불쾌한 일을 더듬는것 같았다. 

한기석은 신명이 나서 계속했다. 

《시체로 되여 바다가에 널려진 사람들이 파도가 소리치며 밀려들 때마다 숨을 쉰다고, 물을 내뿜는다고 세번네번 다시 촬영할 때 인정사정을 모르는 그 <다시!>라는 소리가 정말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싫었습니다.》 

《그랬을거요. 어떤땐 예술적계발로는 안될 때가 있거든. 그래서 억지다짐으로 그런 강요를 하게 되지. 그건 다 자기 무능을 스스로 드러내보이는 바보짓이요.》 

한기석이 싱그레 웃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출가동지, 안되겠습니다. 정말 안되겠습니다.… 너무 고지식합니다. 이런 기쁜날에 흉을 봤을게 뭡니까? 연출가동지가 연출을 시작해서 영화를 몇편이나 만들었는가 꼽아보다가 연출가동지 예술년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한테 무슨 년조라고 할게야 있나?》 

《그러지 말고 언제부터 어떻게 영화를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나 들려주십시오. 언제 물어봐야 이야기를 안했는데 오늘이야 기쁜날이 아닙니까. 한턱 쓰는셈치고… 후에 내가 혹시 연출가동지를 회상하여 무슨 글이라도 쓰게 될지 압니까. 인간, 예술가로서의 연출가동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최승진은 혼자라면 몰라도 로영무까지 곁에 앉아있으니 더욱 어색해졌다. 

《시시한 소리말구 마시기나 하게.》 

《아- 그러지 마십시오.》 

《겸손이 아니라 사실상 나한테는 회상이라고 할만한 이야기거리가 없네.》 

로영무가 입을 열었다. 

《피끓는 호기심이 탐험가 마젤란을 낳았다는 소리도 있다는데 막무가내로 그래서는 저 친구들을 당해내지 못할것 같구만… 내가 좀 이야기할가… 승진연출가가 영화예술에 뜻을 둔건 기석동무랑 밥상밑에서 기여다니던 그 시절 이야기일지도 몰라. 말하자면 왜정때지. 조선영화의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라운규선생이 비명에 요절하자… 그 요절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밑에 신음하던 우리 조선예술인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그런 비참한 죽음이였어. 선생이 없자 청년영화인들은 마음속의 기둥을 잃은거나 같은 신세로 되여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네. 개중에는 혹시 일본에 건너가면 영화예술의 기법이라도 배울수 있지 않을가 하는 일루의 희망을 품고 파도사나운 현해탄을 건너간 청년들도 있었는데 승진연출가도 그런 청년들중의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네.》 

로영무는 이런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후날 자기 벗을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되겠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취흥에 떠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본도꾜에 있는 일본대학이라고 하는 사립대학의 예술과에 겨우 입학해서 고학을 했지… 가만 그 대학이 도꾜 어디에 있었다구 했더라?》 하고 로영무가 최승진을 돌아보자 그는 괴로운 회억에 잠긴듯 이마살을 찌프리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채 나직이 뇌이였다. 

《대학 본교사는 도꾜 간다구에 있었구… 예술과는 이께부꾸로에서 지상철도로 샤꾸지공원행 전동차를 타고 한참 가서 에고다… 에고다라는 교외의 음침한 거리에 있었지…》 

그의 목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들리였다. 

그는 갑자기 열물같이 쓰거운것이 묵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듯 입술을 이그러뜨렸다. 

《돈이 없어 고학을 하자니 별의별 고생을 다 했소. 다다미 석장짜리방을 세내서 자취하면서 신문배달, 우유배달, 요꼬하마항에 나가 화물선에서 석탄을 부리는 일… 그때 돈으로 200원이 넘는 엄청난 수업료를 학교 서무과에 물지 않으면 제적당하니까 별수 없었지. 그 시절에 읽은 한 조선시인의 시가 생각나. 

 

먹었는가 묻지 말라 

굶었는가는 더욱 묻지 말라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내 신세가 바로 그랬네. 어떤때는 3전짜리 설렁탕도 사먹지 못했으니까. 나중에는 인분청소부노릇도 하고 제일 치사한 얼음장사, 말하자면 얼음세부판매라는것까지 하게 됐네. 얼음세부판매라는게 어떻게 하는건지 아는 사람이 없을거네. 바위같은 얼음덩이를 도매상한테서 넘겨받아가지고 그걸 톱으로 잘게 켜네. 벽돌장만큼 혹은 더 작게… 그다음 그것들을 니야까라는 손수레에 싣고 음식점이나 매춘가의 창녀들한테 파는거네.

도매상한테서 넘겨받을 때 도꾜의 그날 기온에 따라 운반도중 더위에 얼음이 얼마나 녹아내리겠는가 타산해서 그 감모량을 정하고 그만큼 값을 내려주는데 손수레를 끌고 빨리 달려 운반시간을 단축하는데서 리익금이 나오는셈이지. 결국 내 다리가 얼마나 빨리 놀려지는가에 달려있네. 굼뜨게 달린다든지 교통순사한테 잡히거나 인파속에 들어 어물대다가는 얼음이 다 녹아 밑지는 판이요. 그래서 도꾜의 그 무서운 불볕밑에서 매일 땀으로 미역을 감으며 신쥬꾸거리, 아사꾸사거리로 죽기내기로 뛰여갔지. 한푼이라도 더 벌자구… 해방후에 여기 촬영소에서 첫 체육경기대회가 있었을 때 나는 남자 3 000m경기에서 일등을 했는데 응원하던 동무들이 모두 달려들어 나를 공중에 들어올리고나서 너무 대견하고 희한하여 내 딴딴한 다리를 주물러보며 이전에 륙상선수로 지낸적이 있었는가고 물었네. 나는 겉으로는 웃어댔지만 속에선 눈물이… 피눈물이 떨어졌네… 얼음장사이야기를 더 하면 한번은 내 얼음을 산 음식점에서 소동이 벌어졌네. 손님이 받아놓은 빙수그릇속에 떠있는 얼음덩이안에 죽은 벌레가 얼어붙어있었거든. 

이튿날 얼음을 팔러 다시 찾아가자 음식점주인놈이 짐승처럼 사나와져 손수레를 뒤엎어놓고 발길질로 얼음을 산지사방으로 차버리고 뭇매질을 하면서 이제부터 소문이 거리에 쫙 퍼져 손님들이 오지 않아 문을 닫게 됐다고 하며 손해배상을 하라고 을러멨소. 내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네. 그때의 치욕감을 무슨말로 말해야 될지. 아하 참… 그러루한 일이 있을적마다 고향으로 돌아오고싶었지만 이…이 가슴에서 타번지는 향학열때문에 또다시 얼음수레를 끌거나 신문배달노릇을 하게 됐지. 그때 일본에서는 돈만 있으면 공부하기 헐했거든. 출판업이 괜찮게 발전해서 책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서점가에 나가면 없는 책이 없었네. 호화장정의 세계문학전집들, 예술, 철학, 종교, 경제학… 돈만 있으면 아무 책이나 다 살수 있었지. 나는 맑스주의 서적도 거기서 사서 읽었소. 아마 그 시기 우리 고학생들을 통해 숱한 맑스주의 서적들이 건너왔을거요. 대학의 교수진도 그만하면 강한 편이였고…》

《그랬습니까.》 

한기석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본에는 일찌기 세계 각종 사상조류들과 예술조류들이 다 들어와있었네.》 

한기석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우리 세대는 안되겠습니다. 본것도 적고 체험도 적고… 한 음악평론가는 이렇게 썼더군요. 교향곡의 심각한 극성은 작곡가자신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체험했거나 상상한 심리정서적드라마의 표현이다… 연출가동지가 만든 작품들에 극성이 그처럼 강한 비결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우리한테는 그런 체험이 없지요. 우리 사회제도에서야 어디 그런 체험을 할래야 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안되겠어요.》 

최승진이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공연한 개탄이지. 위험한 생각이요. 불행한 인생체험에만 극성이 있는건 아니요. 행복한 체험에도 심각한 심리정서적인 극이 있소.》 

한기석이 갑자기 저가락을 빈 접시우에 던지였다. 

《연출가동지! 이러나저러나간에 당신들은 영화예술이란 이 길에 들어서서 다 대성을 했단말입니다. 이제는 일가견을 이루고 세상이 다 아는 작품들을 수태 만들지 않았습니까!》 

국수대접들이 놓인 다반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던 윤희가 무슨 언쟁이라도 생기지 않았는가싶어 주춤 멎어서며 놀란 눈으로 한기석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도대체 뭡니까. 언제까지 의상궤짝이나 메고다녀야 합니까? 연출가동지네 세대는 벌써 20대에 작품들을 맡아 연출했고 자기 영화들을 통하여 세상에 다 알려졌습니다. 물론 준비된 자질과도 관계되겠지만… 그때 우리 나라에 연출가가 통털어 두세명밖에 없는 사정과도 관계된다고 봅니다. 지금은 수많은 연출가들이 과학원 원사들처럼 관록을 가지고 자리에 틀고앉아있기때문에 새싹은 솟아날 틈새기가 없습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연출가들은 우리 후대들을 생각해줘야 합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예술위원회앞에서 우리 기량을 보증해주면 우리한테도 작품을 맡겨줄게 아닙니까. 이 철룡이만 봐두 그렇습니다.》 

한기석은 철룡의 어깨에 손을 다정하게 얹고는 말을 계속했다. 

《부연출을 몇년이나 했습니까. 강철룡이가 왜 강고민이 됐겠습니까?》 

최승진은 한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몸을 뒤로 젖힐사하며 껄껄 웃었다. 

《이거 공격이 대단하군. 약속하오. 약속하지. 그런 보증은 언제든지 서줄수 있소.》 

그 말에 신명이 난 한기석이 맥주고뿌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손등으로 맥주거품이 흘러내렸다. 

《자. 그럼 그 약속을 위해!》 

그들은 떠들썩하게 마셨다. 

로영무는 취기가 벌겋게 오른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우리 영화를 가지고 외국에 나가본 사람은 승진연출가하고 나밖에 없는것 같은데 국경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조국의 명예를 걸머지게 된단말이요. 외국관객들은 한편의 영화를 통하여 그 민족의 사상감정과 정신미, 풍습, 지어는 국력까지 느끼네. 외국에 나간 한편의 영화는 분명히 그 민족의 사상감정의 사절이나 다름없지…》 

식성이 좋은 친구들까지 안주를 집는것을 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작년 모스크바영화축전때 일이요. 축전장소인 한 영화관에서 우리 예술영화를 상영했는데 필림 서너권이 돌아간 다음부터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소. 그러다가 여기 저기에서 여러명씩 움쭉 움쭉 일어나 통로를 따라 우르르 밀려나갔소. 영화가 다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얼굴을 들수 없었소. 몸이 식은땀에 젖어있었소. 조국과 우리 민족정신, 우리 사상감정이 외면과 배척을 당한것 같으면서 정말 죽고싶도록 괴로웠소. 정신없이 복도로 나왔는데 무테안경을 코등에 걸고 재빛 수염이 텁수룩한 녀석이 사람들속을 비집고 나한테로 다가와 례절바르게 인사하고는 자기 소개를 했소. 프랑스연출가라고… 그리고는 <당신네 나라는 맑은 아침의 나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오늘 은막에서 보니 비도 자주 오고 하늘도 늘 흐려있는 아주 어둑한 나라이군.> 하면서 이죽거렸소. 최신형의 영사기에 우리 필림을 걸고 돌리니 낮은 현상수준이 그대로 드러나 은막에 비쳐진 화면이 비가 오는것처럼 보였던거요. 나는 그자의 비양까지 받자 모욕감과 울분이 터져올라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쥐였소. 통역원이 내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생겼을지 모르오. 나는 사실 이 수치스러운 일을 이때까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댔소.》 

한기석이와 몇몇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쳤다. 

《축전에 나갑시다!》 

《봉창을 합시다!》 

《<광풍>으로 사나운 바람을 일으킵시다!》 

그 무슨 괴로움이라도 묵새기고있는듯 한손으로 이마를 싸쥔채 잠자코 앉아있던 철룡이 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최승진을 지켜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출가동지, 무엄한 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의 연기는 과장됐습니다. 때문에 오늘 터져오른 박수갈채에 비하면 영화가 좀 손색이 있습니다.》 

로영무가 난처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저가락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나직하게 핀잔의 소리를 하였다. 

《그건 무슨 소린가…》 

순간에 좌석의 공기가 식어버린듯하였다. 모두 아연해진 얼굴로 성공한 연출가며 불손한 도발자를 번갈아 돌아보는 가운데 최승진이 선배의 아량으로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처음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보는군. 헛허허…》 

한기석이 그의 뒤덜미를 잡고 흔들어대며 껄껄 웃어댔다. 

《강고민… 과시 강고민이야 하하하… 이런 강짜니까 미혜가… 미혜가 속이 탈수밖에 …》 

철룡은 불꽃이 펑긋 이는 눈으로 돌아보며 기석의 손을 뒤덜미에서 홱 치워버렸다. 그바람에 빈 맥주병이 넘어져 방바닥에 딩굴었다. 

그때 윤희가 국수그릇들을 들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총서《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리 종 렬

제 1 장

 

5

 

 

최승진의 집에서 나온 강철룡은 전차정류소쪽으로 곧바로 걸어나갔다.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산뜻산뜻 스치였다. 

한기석이 뒤따라와 그의 팔을 끼였다. 

《여 철룡이, 성났댔는가. 그쯤한 롱담에… 졸장부야. 천하에 졸장부라니까. 동무가 술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릴 하니까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이… 분위기를 돌리자구 그랬어. 정 용서안되면 내 눈판에 엎드려 절을 하지. 절을…》 

술에 잔뜩 취한 한기석은 비틀거리면서 눈길에 엎드리려고 했다. 

철룡은 그를 끌어올리며 언짢게 소리쳤다. 

《자, 자, 빨리 가자구!》

둘은 서로 붙안고 걸어갔다. 

《철룡이, 그래두 나만한 벗이 없는줄 알라구. 이자 오면서 보니까 미혜네 집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더군. 동무가 승진연출가네 집에 왔다가 들리지 않을가 해서 기다리는지도 몰라.》 

철룡은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중층한 아빠트의 모든 창문들에 어둠이 서려있었으나 유독 최승진이네와 장미혜네 창문들에서만 불빛이 환히 흘러나오고있었다. 

《가라구 가. 오늘밤에 아예 결판을 내라구 결판을… 어머니도 없겠다. 남아장부가 한번 마음먹으면 다지 그냥 질질 끌기만 하겠나.》 

철룡은 취기때문인지 미혜가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처녀의 윤이 흐르는 머리칼, 그윽하게 빛나면서도 쌀쌀한 빛이 서려도는듯한 동실한 눈, 맑은 웃음소리… 모든것이 그리워났다. 

《발동이 안걸리는 모양인데 자, 내가 불도젤이 돼서 떠밀어주지.》 

한기석은 철룡의 배에 머리를 박고 기운껏 떠밀었다. 

《부르릉…》 

 철룡이 문을 여니 미혜는 기겁한 얼굴로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니…》 

그리고는 들어오라는 소리도 없이 홱 돌아서 세면장쪽으로 가버렸다. 

철룡은 어정쩡해서 문밖에 서있다가 제발로 들어갔다. 

그는 미혜의 방 창곁의 책상앞에 마주앉아 처녀가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미혜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면장쪽에서는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빨래질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수도물이 흘러내리는 그 소리가 물이 아니라 시간이 철철 흘러버리는 소리로 들렸다.

미혜의 어머니가 병치료때문에 강서료양소로 떠나가자 그는 될수록 처녀만 사는 이 집으로 자주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동네사람들속에서 미혜의 얼굴을 깎아내릴수도 있고 또 방종한 놈팽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공간을 노리는 소행인것 같아서였다. 그의 자존심이 잦은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철룡은 비로소 누구의 몇마디 소리에 속이 흔들려 여태 지켜온 절제를 허물고 이런 밤중에 그것도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온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였다. 미혜도 그래서 불쾌해진것이 분명했다. 서가에 가쯘하게 꽂혀있는 책들과 원탁우에 나란히 놓인 분장도안들, 화분밑에 깐 정갈한 꽃수받치개, 알른거리는 장판… 방안의 모든것들이 자기 예술을 사랑하고 성품이 단정한 처녀의 정신적면모를 보여주는듯하였다. 

철룡은 미혜가 들어오지 않는것이 전혀 고깝지 않았다. 오히려 자책감이 들며 기다리는 사이에 머리가 맑아지는듯하였다. 

그는 마음같아서는 일어서 나오고싶었으나 그럴수도 없어 앞벽에 붙어있는 사진액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액틀속의 약간 퇴색한 사진에서는 한창시절의 아름다운 녀배우 리명선이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빤빤히 깎은 딸 미혜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있었다.  

그것은 미혜의 백날사진이였다. 

제대군인의 순박한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철룡이 처녀를 따라 이 집으로 처음 찾아왔을 때 미혜는 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어머니, 이건 장미혜동지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분장실에서 나서 분장실에서 자랐다고 해요. 호호호… 아무데서나 생활적이 못된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저만큼 생활을 사랑하고 생활적인 녀자도 드물거예요.》 

철룡에게는 그 말이 여간 재미나고 뜻깊게 들리지 않았다. 어릴적에는 물론 군대복무기간 영화에 그토록 마음이 팔려있으면서도 이름난 녀배우 리명선의 딸과 운명적인 인연이 맺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철룡은 그날 이 방에 처음 들어서서 자기가 성장한 농민가정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생활체취에 가슴을 울렁거리며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리명선의 손때가 배여있는듯한 양복장들이며 삼면거울이 붙은 크고 번쩍거리는 경대, 품위있는 무늬가 그려진 창가림, 방구석에 세워진 무희의 목각상,… 보는것마다가 예술적향기를 풍기고있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었다. 

강철룡은 군대에 복무할 때 련대의 젊은 군관들이 결혼식을 한다든지 그들에게로 약혼녀가 찾아온날이면 자기에게도 언제인가는 저런 날이 올것이며 그리고 절대 범상하지 않고 어떤 비상한 인연을 통해서만 사랑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감정이 움틀것이라고 공상했었다. 

그러나 미혜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비상한 사연이란 없었다. 있었다면 일상적인 사업속에서 한가지 우스운 일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로 되여 뜻밖의 감정이 싹튼것 같았다. 

그는 부연출로 배치되여 1년이 지나 력사물주제의 작품을 형상하는 한 제작단에 미혜와 함께 망라되여 일한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철룡의 눈에 비쳐진 미혜는 그저 한 분장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개성적인 미모로 하여 연출가들이 탐나하지만 배우의 성공과 관련된 그 어떤 유혹에도 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직무를 지키고있는 처녀였다. 

제작단은 실내촬영장에서 몇장면을 찍고 곧 력사유적들이 많은 개성으로 가서 야외촬영을 계속하였다. 어느날 미혜가 촬영을 앞두고 선비의 수염을 잃어버렸다고 얼굴이 새까매져 돌아갔다. 온 제작단이 떨쳐나서 려관방들이며 야외촬영장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수염은 나타나지 않았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는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서 자기는 촬영이 끝난 다음 수염을 분장사한테 바쳤노라고 우겨댔다. 

미혜는 그것을 받았다거나 받지 않았다거나 하는 소리도 없이 그저 울상이 되여 돌아갔다.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까짓 수염이야 하나 제꺽 새롭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처녀를 위로하였다.

미혜는 그 소리를 분장미술에 대한 홀시로 받아들였던지 발끈해졌다. 창작이 계렬식생산인줄 아느냐고 쏘아붙이면서… 무슨 수를 써도 잃어버린것과 꼭 같은 수염은 절대 만들어낼수 없다는것이였다. 그것은 보통수염도 아니고 좌천되여 초야에 묻혀버린 절개굳센 량반의 고결한 성품과 그 허전한 인생의 슬픔을 표현하는 형상세부이기때문에 자기가 한달동안이나 고심하여 창작한것이라고 하면서 눈물까지 보였다.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방도를 모색하다가 개성에 작중인물인 선비와 비슷한 용모의 로인들이 있을수 있는데 그들을 잘 설득하여 수염 몇오리씩 잘라오자는 안을 내놓았다. 

제작단장은 모두 정신들이 있는가, 구습에 완고한 이 지방에서는 절대 그렇게 할수 없다고 엄하게 꾸짖었다. 

제작단은 촬영을 중지하는가 마는가 하는 난처한 궁지에 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철룡은 그 수염이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제야 이틀전일이 생각났다. 

선비역을 맡은 배우가 점심시간에 촬영장곁의 간이식당에서 숟가락질하기 거치장스러운 수염을 식탁에 떼놓고 식사하고는 그냥 나갔는데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것이다. 

철룡은 그때 작품의 전반적인 조화와는 관계없이 자기에게 대사화면을 몇개 더 달라고 요구하는 주인공배우와의 론쟁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 일을 까마득히 잊었던것이다.  

수염을 분장사에게 넘겨준 다음 연출가는 기쁜김에 철룡의 어깨를 툭 치며 공연히 처녀를 울렸다고 하면서 과시 강고민이라고 웃어댔다. 

철룡은 처녀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촬영의 전기간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도와주었다. 영화가 세상에 나간 다음 그는 신수사납게도 여름감기에 걸려 합숙에 누워있게 되였다.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던 미혜가 문병와서 반시간가량 앉아있다 갔는데 밤에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한달후 그들은 남다른 사이로 되였다. 그때 철룡에게는 사랑이란 누구도 없는데서 둘이 함께 있고싶은 감정이고 욕망이였다. 그래서 휴일이나 명절날이면 처녀를 끌고 사람들의 눈을 멀리 피하여 교외의 숲속을 돌아다녔다. 미혜는 까다롭게 굴지 않고 순순히 응하였다. 

늦어서 첫 사랑을 체험하는 제대군인의 끝없는 열정과 처녀의 순진하고 장난기 심한 마음은 한데 어울려져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별의별 환락을 다 궁리해냈다. 철룡이 까마득한 살구나무로 기여올라가 가지를 마구 흔들어 열매를 털면 처녀는 밑에서 좋아라 손벽을 치며 돌아치면서 그것들을 주어모았다. 《선물찾기》를 시작하여 철룡이 수풀속을 돌아치다가 나리꽃 한송이를 꺾어가지고 뛰여가서 처녀에게 선물로 내밀면 미혜는 등뒤에 감추었던 밥알꽃송이를 보란듯이 내미는것이였다. 철룡이 싸리버섯을 내밀면 처녀는 어느새 어디서 땄는지 참나무버섯을 내밀었다. 철룡이 돌쪼각을 내밀면 미혜는 모래 한줌을 내밀었다. 나리꽃과 밥알꽃, 싸리버섯과 참나무버섯, 돌쪼각과 모래 한줌… 보지 않고도 맞아떨어지는 이런 류사한 일치가 너무 신기하고 기뻐서 행복감에 한껏 도취된 둘은 풀밭에 가지런히 누워 나무가지들사이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미래를 공상하였다. 

공상속에 그려지는 그들의 미래는 영화연출가와 분장예술가의 조화로운 가정이였으며 보람찬 창조생활이였다. 

철룡은 공상에 잠겼다가도 아이들처럼 천진란만해져 힘살이 꿈틀거리는 팔뚝자랑을 했고 미혜는 살결고운 팔에 도드라진 두개의 우두자리를 보이며 자기 몸에는 이 두개의 상처밖에는 없다고 자랑하였다. 때로는 공연한 트집을 걸어 다투기도 하였다. 때로는 예술적인 문제를 가지고 열이 나서 론쟁도 하였다.

철룡은 미혜와의 공통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하여 미술사를 부지런히 공부했고 미혜는 철룡의 마음에 더 들려고 그의 식성에 따라 매운 음식도 꺼려하지 않고 먹다가는 입을 싸쥐고 맴돌이쳤다. 철룡은 그것이 재미나서 큰소리로 웃어댔고 미혜는 그런다고 주먹으로 그의 잔등을 콩당콩당 때렸다. 

철룡은 언제인가 구라파의 한 시인이 사랑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거목의 뿌리를 붓으로 삼아 저 하늘에 가득 <내 그대를 사랑하노라>고 써놓고싶다고 노래한 시를 읽고 너무 표현이 과장되였다고 비난한적이 있었는데 지금에는 그 심정이 어느정도 리해되였다. 그는 하늘에는 글을 써놓고싶지 않았지만 땅에는 사랑의 표적을 남기고싶었다. 

그래서 미혜가 무척 좋아했고 그 시절 어느 식료상점에나 흔해빠졌던 칼피스를 여러병 사들고 길을 떠났으며 그것을 마시고는 빈병을 땅속에 깊이 박아넣으면서 미혜더러 20년이나 30년이 지나 이자리에 다시 찾아와서 오늘을 추억하자고 했다. 

한번은 처녀가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 

철룡은 그 물음에 당황해져 잠시 망설이다가 기지있게 대답했다. 미혜가 이슬로 될수 있다면 그를 늘 눈에 넣고다니겠노라고… 

처녀는 전률이 오는듯 몸을 떨며 한번 이슬이 되여봤으면… 하고 탄식했다. 

빈병은 모란봉의 숲속에도, 대성산 기슭에도, 장수산 중턱에도 묻혔다. 그렇게 병들을 묻고나면 그 산들이 모두 사랑의 증견자, 사랑의 기념비로 느껴졌으며 그 산들이 허물어져 없어지지 않는 한 자기네 사랑의 약속도 허물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가슴에 바위처럼 들어앉은것이였다.… 

침대우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검은 남자장갑이 눈길을 끌었다. 무척 눈에 익은 장갑이였으나 누가 저런것을 끼고다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미혜가 들어왔다. 처녀는 세타소매를 팔굽까지 걷어올려 시뻘겋게 드러난 팔에서 물기를 털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릿한 빨래비누냄새가 풍겨왔다. 처녀는 빨래를 성급하게 한탓인지 빨갛게 홍조가 타오른 얼굴로 숨소리를 쌔근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나는 묵은 빨래를 둬두고는 잠도 못자요. 그리고 처벌이였어요. 밤늦게 술마시고 찾아온… 정신이 좀 맑아졌어요?》 

철룡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저녁 승진연출가동지네 집에 모였다지요? 잘 놀았어요?》 

《괜찮았소.》 

《전 촬영때문에 남아있었는데 모두 퇴근한 다음 박경섭동지로부터 부총장동지한테 전화가 왔어요. 수령님께서 영화가 좋다는데 어서 보고싶다고 하셨대요. 얼마나 좋을가…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내 얼굴이 어떤가?》 

(저건 한기석이 장갑이다. 틀림없어. 그의 장갑이 어떻게 여기와 있는가?) 

촉기빠른 미혜는 그의 눈길이 흘깃 갔던데를 돌아보더니 그 장갑을 쥐여들어 무릎우에 올려놓으며 한기석이 장갑이라고 했다.  

《코가 터져 손가락이 나오게 됐어요. 기워주자고 가져왔어요.》 

철룡은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와졌느냐고 묻자다가 처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가봐 그만두었다. 

《한가지 물어보면 솔직히 말하겠소?》 

《내가 언제 솔직하지 않은적이 있어요?》 

《기석동무한테 무슨 소릴 한적이 있소?》 

《아니… 무슨 소린데요?》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거나 속이 탄다거나 그러루한…》 

《그가 뭐라고 해요?》 

《그저 그러루한 소리요.》

《어마나, 그래서 이 밤중에 찾아왔군요. 호호호… 어린애처럼… 언제 철이 들가… 자기가 이전에 나한테 말하구서… 맑은 호수를 보면 누구나 돌이나 흙덩이 같은걸 던져보고싶어 못견딘다고… 어떻게 흐려지는가. 어떻게 파문이 이는가 보고싶어서…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 알고싶어서… 그래서 자그마한 흙덩이를 던졌겠는데 뭘 그래요.》 

철룡은 어줍게 웃었다. 

《아니, 그래 온건 아니요.》 

처녀는 눈을 곱게 흘기였다. 

《철룡동무… 기석오빠하고 사이좋게 지내요. 엄마하고 그의 아버지하고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고 부모들의 그 인연때문에 우리도 좀 가까와요. 약간… 가까이 지내겠어요?… 싫어요?… 싫으면 좋도록 해요.》 

《싫고 좋고가 있는가,  같은 부서,  같은 부연출인데… 우린 가까운 사이요.》 

《그래도 싫어하는것 같은데요… 좋아요. 우리는 국가들의 관계처럼 벗의 원쑤는 나의 원쑤다, 벗의 벗은 나의 벗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련대성의 부담을 지지 말자요. 개인들사이에 그런다는건 좀 별스럽지 않아요?》 

《아니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미혜가 좋아하면 그만큼 우리들사이는 멀어지오.》 

《아이, 꼭자다…》 

미혜는 무릎우의 장갑을 침대머리쪽으로 던져버리고는 탄력있게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처녀는 한손으로 책상모서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습관된 체취가 뭉클 안겨들었다. 

《철룡동무…》 처녀는 살뜰한 정을 담아 나직이 속삭였다. 

《어째 나를 산속으로만 끌고다녀요?》 

《그게 싫소?》 

《싫은건 아니지만 남들이 다 하는것처럼 하고싶어요.》

《남들이…?》 

《어째 집에 가자는 소리는 한번도 안해요?… 남들이 다 하는것을…》 

(남들이… 남들이… 남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랑다음에는 약혼… 다음엔 결혼…가정…) 

《형님이랑 형수님한테랑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히구싶어요.》 

그것은 기다리고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던것이였다. 행복감에 가슴이 터지는듯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감이 엄습해들었다. 

철룡은 의자를 뒤로 밀어버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굽실굽실 흘러내린 처녀의 윤나는 머리가 가까이에서 향기를 풍겼다. 

《우리집에 가고싶어?》 

미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말아요… 얌전하게 굴게요.》 

철룡은 처녀의 따뜻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미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느냐?》 

둘은 화닥 놀라 물러섰다. 미혜는 황황히 복도로 뛰여나갔다. 

《아이, 엄마, 어떻게 이런 밤중에…?》 

《료양소에서 여기로 오는 차편이 있어서 떠났다.》 

《거기 약수가 맞아요?》 

《모르겠다. 꼴을 보려마.》 

《얼굴이 좀 좋아진것 같은데요.》 

《좋아지긴…》 

미혜가 무엇이라고 귀속말로 속삭이는것 같더니 걸어들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보통아낙네들의 나들이차림처럼 수수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리명선이 방안에 꼿꼿이 서있는 철룡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놀라운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총각의 인사에 린색한 미소로써 대답했다. 

《너무 늦었구만…》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문앞을 지나 웃방으로 들어갔다. 미혜가 따라들어가 소곤소곤 변명하는 소리가 나더니 리명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해한다. 리해해…》 

《승진아저씨 작품이 시사회에서 대절찬을 받았어요. 그래서 연출실에서랑 그 집에 다 모였더랬어요. 축하하러…》 

《그래?… 그렇게 걸작이냐? 아유- 이제야 우리 영화계에 볕이 드는 모양이구나… 료양소에서는 이제 돌아가면 사직해서 년로보장에 넘어가자고 마음먹었더랬는데…》 

《엄마, 이런때 왜 사직하겠어요. 그런 생각 말아요.》 

철룡은 그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등골에 식은 땀을 느끼며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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